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암호화폐 산업에 대한 규제 압박을 강화하는 가운데 주요 기업의 이탈 우려가 커지고 있다.
SEC는 암호화폐가 대부분 '증권'에 해당하기 때문에 엄격한 등록·공시 요건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리플, 코인베이스, 크라켄, 팍소스 등 미국에 본거지를 둔 암호화폐 주요 기업에 '증권법' 위반 소송이나 위반 가능성을 제기하며 규제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코인베이스, 리플 등 대형 플레이어들은 암호화폐 산업 발전을 저해하고 혁신 기회를 박탈할 수 있는 미국 규제 접근 방식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브라이언 암스트롱 코인베이스 CEO는 지난주 CNBC와의 인터뷰에서 SEC 규제 조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SEC 위원장이 유독 반(反) 암호화폐적 견해를 취하며 독단적으로 싸우고 있다"면서 "SEC가 업계를 규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억제하려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SEC와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는 리플의 CEO 브래드 갈링하우스는 "규제 당국이 제기한 소송이 끝날 때까지 2억 달러를 투입할 것"이라면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아울러 "정책보다 정치가 우선이 되는 국가는 경제적 투자 측면에서 좋은 결정을 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미국은 조금이 아니라 많이 뒤처지고 있다"면서 "리플이 미국에서 시작한 기업이고, 나 자신 역시 미국 시민권자인 만큼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코인베이스와 리플은 해외 시장으로 거점을 옮길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SEC에서 웰스 노티스(Wells Notice, 기소 예정 통지서)를 받은 코인베이스는 지난달 불확실한 규제 환경이 계속된다면 해외 이전 옵션까지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리플은 이달 9일 두바이에서의 사업 확장 계획을 발표하며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피력했다.
갈링하우스 리플 CEO는 "두바이와 유럽은 암호화폐 규제 체계를 만들어 훨씬 유리한 시장임을 입증하고 있지만, 미국은 완전히 막혀 있다"고 지적했다.
◇ 암호화폐 업계, 미국 떠날 수 있을까
한편, 업계는 미국 암호화폐 기업들이 실제 미국을 떠나 해외로 본사를 옮길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보고 있다.
라리사 야로바야(Larisa Yarovaya) 사우샘프턴 대학교 금융학 부교수는 CNBC에 "미국은 가장 큰 암호화폐 시장 중 하나"라면서 "암호화폐 기업들이 미국을 떠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시장 조사업체 모닝컨설트가 코인베이스 의뢰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암호화폐를 보유한 미국인은 5000만명 이상이다.
그는 암호화폐 기업이 해외 이전 의사를 밝히는 것에 대해 "규제 문제로 투자자 패닉과 시세 하락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 있는 것처럼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면서 "하락장에서도 자산을 호들(HODL, 보유)하는 비이성적인 행동을 부추기기 위한 일반적인 전술"이라고 지적했다.
조나단 레빈(Jonathan Levin) 체이널리시스 공동 설립자도 런던에서 진행된 CNBC와의 인터뷰에서 "최상위 시장인 미국 시장을 완전히 떠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면서 "기업들은 단지 우선 순위가 높지 않았던 해외 시장에 전보다 집중적으로 진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역외 로펌 하니스(Harneys)의 파트너 조지 웨스턴(George Weston)은 "새로운 지역에 가서 현지 인재로 인력을 대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면서 "이미 규모가 큰 기업들이 미국 밖으로 나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로 갈링하우스는 2020년부터 해외 본사 이전을 언급, 영국, 스위스, 싱가포르, 일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을 후보지로 거론하기도 했지만 실제 이전은 이뤄지지 안혹 있다. 코인베이스 역시 해외 이전 옵션을 언급한지 한 달 만에 "미국에 항상 남아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하지만 일각에선 미국 외 국가 규제 환경이 개선된다면 해외 이전이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헤스터 피어스 SEC 위원은 지난주 파이낸셜타임즈 컨퍼런스에서 "미국이 규제 체계를 갖추지 않는 것은 제 발등을 찍는 일"이라며 규제 문제가 산업 발전에 발목을 잡는다면 시장 이탈은 가능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피어스 위원은 유럽연합의 암호화자산시장규제(MiCA) 입법을 언급, "이렇게 빨리 규제를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칭찬할 만한 일"이라면서 "좋은 규제 체제는 사람들을 유입시킬 것이며 MiCA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로펌 클리포드 찬스(Clifford Chance)의 파트너인 디에고 발로 오시오(Diego Ballo Ossio)는 "영국, 유럽연합 등 여러 국가에서 암호화폐 기업을 위한 명확한 규제 체계를 만들고 있다"면서 "다른 국가들이 암호화폐 기업을 위한 더 나은 후보지를 제공할 것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 암호화폐 기업들이 보다 안전한 혁신을 위한 해외 운영 허브를 만드는 것은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로펌 BCLP의 파트너 다니엘 세팔베이(Daniel Csefalvay)도 "기업들이 미국을 떠나고 싶진 않겠지만, SEC가 지금 같은 방식을 고수한다면 존폐가 달린 기업들은 결국 다른 방식을 찾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세계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바이낸스는 미국 내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영국 법인 설립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패트릭 힐먼 바이낸스 최고전략책임자(CSO)는 "지난 6개월 동안 미국 시장은 매우 혼란스러웠다"면서 "특히 코인베이스에 대한 SEC의 조치는 미국이 이상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