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중앙은행들은 2017년 상승장을 기점으로 급부상한 암호화폐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중국은 암호화폐 거래를 전면 금지하면서 “암호화폐가 위안화를 위협하지 않도록 보호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그럼에도 현금 사용이 감소하고 IT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등 환경이 급변하면서 중앙은행들은 통화 발행 주체로서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디지털 화폐 연구를 실시해왔다. 지난해 1월 국제결제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중앙은행 70%가 중앙은행 발행 디지털화폐(CBDC)를 연구 중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상반기만해도 CBDC 발행 가능성은 굉장히 낮았다. 이미 발전된 결제 기술을 갖춘 나라에서는 CBDC 발행 근거가 불충분했다. 거래 비용 절감, 유동성 및 사용자 편의 개선 등 CBDC 발행을 통한 장점보다는 기존 시스템과 정책을 불안정하게 할 수 있다는 잠재 리스크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CBDC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건 지난해 6월 세계적인 소셜미디어 페이스북이 글로벌 디지털 화폐 ‘리브라(Libra)’ 프로젝트를 공개하면서부터다. 민간 글로벌 화폐의 출현 가능성은 전 세계 중앙은행들을 긴장시켰다. 기존 결제 시스템의 비효율 문제 해결은 시급한 과제가 됐고 CBDC 논의에 불이 붙었다. 유럽중앙은행, 프랑스 재무부 등은 리브라 대응을 위해 CBDC를 개발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특히, 중국은 CBDC 발행에 있어서 가장 발빠른 행보를 보였다. 리브라 공개 직후 중국 인민은행은 2014년부터 디지털 화폐를 검토해왔다며 CBDC 연구를 공식화했다. 중앙은행들이 CBDC 발행에 막 눈을 돌리기 시작한 지난해 연말에는 "CBDC 개발이 마무리 단계에 와있으며, 곧 실험 단계로 들어간다"고 밝히기도 했다.
암호화폐가 ‘화폐’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던 아구스틴 카르스텐스 국제결제은행(BIS) 사무총장은 당시 “리브라로 인해 CBDC 발행 시기가 앞당겨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으면서,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지키는 중앙은행의 역할을 민간에 넘기지 않으려면 디지털 화폐 혁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Fed)은 디지털 화폐를 개발 혜택과 비용을 면밀히 분석하고 있지만 실제 발행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과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은 모두 “향후 5년 내 미국이 디지털 달러를 발행할 필요가 없다”는 데 한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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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주요국 중앙은행 화두는 ‘CBDC’
디지털 화폐 경쟁에서 뒤처지면 자국 통화 영향력과 자주권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는 올해 전 세계 CBDC 발행 움직임을 더욱 구체화하고 가속화했다. 중앙은행들은 대부분 당분간 CBDC 발행 의사가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관련 역량을 갖추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1월 2020년 최우선과제 중 하나로 디지털 화폐를 꼽았다. 유럽중앙은행은 디지털 화폐 분야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이 커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파월 의장은 디지털 화폐의 영향력을 인정하며 연준이 디지털 달러 작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은행도 CBDC 연구를 강화하기 위한 전담조직을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연구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중앙은행들은 혁신 기술을 접목한 CBDC가 결제 효율화, 비용 절감, 금융 포괄성 개선 효과를 더할 뿐만 아니라 민간 화폐에 대한 대응 방안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BIS는 전 세계 66개 은행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약 10%가 3년 내 범용 CBDC를 발행할 계획인 것으로 나타났다. 2023년 전 세계 인구의 20%, 약 16억 명이 CBDC를 이용하게 될 수 있다는 전망이 가능하다.
리브라에 대한 각국 반응은 CBDC에 대한 대중 관심 수준 또한 높였다. 13개국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 51%가 기술 대기업이 발행한 디지털 화폐보다는 CBDC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코로나19 확산에 CBDC 개발 본격화…디지털 화폐 전환 필요성 높아져
올해 3월 코로나19 확산 공포가 금융 시장을 덮치면서 CBDC 개발은 더욱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코로나 위기는 CBDC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한국은행은 보고서를 통해 "사회적 거리두기, 현금을 매개로 한 바이러스 전파 가능성, 봉쇄 조치 등으로 현금 사용이 감소했고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됐다"며 "주요국의 디지털화폐 발행이 빨라질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
BIS는 "코로나19 위기로 취약 계층의 디지털 결제 접근성을 높이고 저렴하고 포괄적인 결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다"면서 "CBDC 발행은 최우선 정책 과제"라고 강조했다. 기관은 2019년말 CBDC 발행 중앙은행 비율(전 세계 20%)이 두 배가량 늘어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또한 CBDC 발행에 대한 관심은 일반 대중들에게서도 나타났다. 일반인들도 CBDC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 인터넷 검색량을 기준으로 분석한 일반 대중 관심도에서 CBDC는 비트코인, 리브라를 앞섰다.
중국, 비공개 실험부터 일반인 대상 실험까지
올해 4월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가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냈다. 중국 인민은행은 선전, 청두, 수주, 슝안 네 개 도시에서 비공개 실험을 진행했으며, 2022년 동계올림픽에서 활용 가능성을 내비쳤다.
인민은행은 지난 7월 중국판 우버로 불리는 이용자 기반 5억 규모의 차량 공유 서비스 ‘디디추싱(滴滴出行)’을, 9월에는 중국 2대 전자상거래기업 징둥닷컴(JD.COM)이 디지털 위안화 실험에 참여시켰다.
10월 중국은 실물 위안화와 디지털 위안화를 모두 법정화폐로 인정하는 '중화인민공화국 중국인민은행법(은행법)' 개정안 초안을 공개하며 디지털 위안화를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그밖에 다른 기관은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거나 판매할 수 없도록 금지했다.
중국 인민은행은 지난 4월부터 8월까지 선전, 쑤저우 등에서 진행한 시범 사업 결과를 공식 발표하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시범 사업 과정에서 개인용 디지털 월렛은 11만 3300개, 기업용 디지털 월렛은 8,859개가 개설됐고, 약 310만 건 총 11억 위안 규모의 디지털 위안화 거래가 이뤄졌다.
올해 10월과 12월에는 선전과 쑤저우에서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디지털 위안화를 배포하고 결제 실험을 진행하는 등 주요국 최초 CBDC 발행을 앞당기고 있다.
일본, 중국에 뒤처질라 디지털 엔화 검토
중국 디지털 위안화 개발 소식에 일본도 디지털 엔화 개발을 더욱 서두르고 있다. 야마모토 고조(山本幸三) 자민당 의원은 “중국의 디지털화폐 발행 움직임에 대응하기 위해 CBDC 개발이 시급하다”며 “디지털 엔화 발행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했다.
일본 중앙은행은 코로나 이후 디지털 엔화 개발을 공식화했다. 중앙은행 관계자는 “CBDC를 중앙은행 최우선 이슈로 다룰 것"이라며 "준비 단계를 넘어 논의를 본격화해나가겠다"고 밝혔다. CBDC 연구는 정부가 매년 발표하는 국가 경제정책에도 편성됐다.
일본 중앙은행은 내년 디지털 엔화 개념증명(PoC)을 실시할 계획이다. 이론적인 연구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실험을 진행해 범용 CBDC 연구·개발에 접근할 방침이다. 은행은 “아직 구체적인 발행 계획은 없지만 결제 시스템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보장하고, 상황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철저히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美 연준, MIT와 디지털 달러 연구 심화
코로나로 타격을 입은 결제 시스템을 개선할 방안으로 디지털 달러가 부상했다. 디지털 달러는 경기부양법 초안에 포함돼 큰 주목을 받았다.
올해 여름 보스턴 연준은 디지털 달러 연구의 일환으로 MIT와 30개 이상의 블록체인을 평가한다고 밝혔다. 연준은 기관 뿐 아니라 일반 소매 부문에서의 CBDC 활용을 검토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10월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연례회의에서는 CBDC에 대한 제롬 파월 미국 연준 의장의 명확한 입장 변화가 확인됐다. 파월 의장은 "연준이 과거의 조심스러운 접근방식에서 벗어나 CBDC 발행의 적합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갔다"면서 "지역 연준의 80%가 해당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현재 미국의 관심은 이미 활발히 가동 중인 국내 결제 시스템을 CBDC가 개선할 수 있는지 여부와 방법을 확인하는 데 있다"며 "디지털 달러가 발행되더라도 현금을 대체하기보단 보완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전과 달리 민간 협력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으며, 각국 중앙은행 및 국제결제은행과 협력과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중국 디지털 위안화를 의식한 듯 "가장 먼저하는 것보다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잠재 이익뿐 아니라 잠재 위험성까지 검토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럽중앙은행, 디지털 유로 발행 여부 내년 1월 결정
유럽중앙은행(ECB)은 디지털 유로가 기존 실물 화폐를 보완하고 유럽의 통화 주권을 보호하는 방안이 될 것으로 보고 연구를 심화하고 있다. 9월 디지털 유로에 대한 상표 등록 출원서를 제출했으며, 10월부터 여론 조사에 착수했다.
ECB는 디지털 유로가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에 안전한 화폐 접근성을 제공하고 유럽의 지속적인 혁신 노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ECB는 보고서를 통해 "CBDC를 빨리 발행해야 경쟁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며 "경쟁에서 밀리면 경제적, 정책적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디지털 유로 발행 여부는 내년 1월 중 최종 확정될 전망이다.
유럽 주요국 중앙은행들도 기술 발전으로 화폐 형태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하며 이러한 변화에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데 한 목소리를 냈다.
프랑스는 연초 8개 업체를 시범 사업 협력업체로 선정하고 자체적인 실험을 진행 중이다. 앤드류 베일리 영란은행 총재도 "몇 년 내 디지털화폐 전환이 진행될 수 있다"며 CBDC 발행을 고심 중이라고 밝혔다.
이달 스위스국립은행(SNB)은 BIS과 함께 CBDC와 분산원장기술(DLT) 도입의 기술적, 법적 타당성을 확인하는 개념증명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한국은행, 내년 CBDC 시범 유통 계획
작년 10월 CBDC 발행 필요성을 낮게 평가했던 한국은행은 올초 전담 조직을 신설하는 등 CBDC 연구에 나섰다.
지난 6월 이주열 한은 총재는 "리브라가 중앙은행 고유의 지급결제 영역까지 파급될 수 있다는 인식이 크게 확산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이에 이 총재는 "지급결제제도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도모해야 하는 중앙은행으로서 이러한 변화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갈 필요가 있다"면서 "현재 진행 중인 CBDC 관련 연구·개발을 계획대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8월 한은은 설계·요건 정의, 구현기술 검토 등 CBDC 기반 업무를 마치고, 이를 바탕으로 2단계 사업 'CBDC 업무 프로세스 분석 및 외부 컨설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내년에는 한은이 발행과 환수를 맡고, 민간이 유통을 담당하는 기존 현금 유통 방식으로, CBDC 파일럿 체계를 가동할 예정이다.
법정화폐 디지털 전환 전망
이처럼 전 세계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디지털 화폐 개발에 뛰어들면서 법정화폐의 디지털화 가능성은 한층 높아진 상태다.
독일 최대 은행 도이체방크는 CBDC가 현금을 대체할 것으로 보고, 발행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네덜란드 비영리 싱크탱크 dGen도 10년 내 3~5개 국가가 법정화폐를 대체하는 CBDC를 전면 도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주요 20개국(G20)을 비롯한 IMF, 세계은행, BIS 등 주요 금융기관들이 금융 시스템 내 CBDC 이용을 공식화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G20에 "글로벌 통화 시스템 발전에 있어 보다 혁신적인 태도를 취하고, 각종 리스크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면서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로 CBDC의 표준과 원칙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 세계 정부 및 국제기구들은 2022년 말까지 스테이블코인 규제 프레임워크를 작성하고, CBDC 설계·기술·실험에 대한 연구 및 채택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IMF와 세계은행은 2025년 말까지 CBDC 거래를 촉진할 수 있는 기술적 역량을 갖출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