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스위스산 시계 등 고급 소비재에 최대 31%의 고율 관세를 부과할 방침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스위스 시계 업계가 일제히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진행 중인 '워치스 앤 원더스(Watches and Wonders)' 박람회 현장에서 각 브랜드 관계자들이 서둘러 회의를 열고 수출 일정 조정과 현지 유통 파트너 대응 전략 등을 논의 중이다.
가장 먼저 움직인 브랜드 중 하나는 아르민 스트롬으로, 창립자인 세르주 미셸은 박람회 참가 중인 주요 소매업체들과 직접 만나거나 전화를 통해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고 밝혔다. 그는 “거래처들 대부분이 ‘당장 보낼 수 있는 제품은 전부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며 당장의 수출 일정을 앞당기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르민 스트롬은 전체 매출의 약 40%를 미국 시장에서 올리는 상황이다. 미셸 대표는 이미 스위스 프랑 강세와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가격을 인상한 직후라며 “이번 관세는 최악의 시점에 터졌다”고 토로했다. 그는 “가격 인상은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다”며, 브랜드와 유통사가 마진을 나눠 손실을 감수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번 결정은 무역수지 적자 국가에 대한 대대적인 관세 정책의 일환으로, 스위스에는 31~32% 수준의 고율이 부과됐다. 이는 경제 규모나 구조 면에서 유사한 유럽연합(20%), 일본(24%), 영국(10%) 등과 비교해도 현격히 높은 수치다. 스위스 연방정부는 공식 성명을 통해 “미국의 관세 산정 방식이 불분명하다”며 “관련 업계, 미국 당국과의 협의를 통해 해법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시장조사업체 본토벨(Vontobel)에 따르면, 미국은 2019년 이후 스위스 시계 수출 증가분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 최대 수요국이다. 지난해 스위스 전체 시계 수출액은 3% 감소했지만, 미국향 수출은 5% 증가해 약 44억 스위스 프랑(약 7조 2,270억 원)에 이르렀다. 반면 중국향 수출은 25% 급감했다.
브라이틀링의 최고경영자(CEO) 조르주 케른은 “관세는 분명 부정적이지만, 독일 속담처럼 항상 끓는 대로 먹지는 않는다. 대응 방안은 준비돼 있다”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LVMH 산하 Hublot과 TAG Heuer, Zenith 브랜드를 총괄하는 장크리스토프 바뱅 CEO는 “정확한 관세 계산 기준조차 불분명한 상황”이라며, 내부 세무 전문 인력과 스위스 정부 당국이 함께 세부 내용을 파악해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관세가 현실화될 경우 가장 타격을 입을 브랜드로 꼽히는 스와치 그룹, 리치몽, LVMH의 주가는 3일 하루 만에 5~6%가량 빠졌다. 특히 롤렉스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상황에 대해 공식 언급을 거부했다.
독립 시계 브랜드 노르케인의 CEO 벤 쿠퍼 역시 관세 위협 직후 “큰 충격이다”고 언급했다. 그는 “샌디 크로스비의 투자 발표로 좋은 하루를 보내던 와중에 급작스러운 관세 소식이 전해졌다”며, 스위스 시계산업연맹(FHS) 등 협회 차원에서 미국과의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많은 시계 제조업체는 “스위스에서 제조된 고급 기계식 시계를 미국 내에서 대체 생산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관세 면제를 요청할 수 있는 명분을 준비 중이다. 앞으로 몇 주간의 외교 및 무역 협상이 스위스 시계산업의 미국 수출 향방에 중대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