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세계적인 비판과 경제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에 대해 암호화폐 거래 역시 제재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암호화폐 거래를 막는 것 자체에는 큰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긴장 상태 속에서 실질적인 군의 움직임을 보인 러시아에 대해 미국 등 서방 국가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 등을 가해 왔다.
지난 2022년 2월 21일(이하 현지시간) 미국은 러시아에 대해 금융제재와 수출 통제 등이 포함된 1차 경제제재를 가함으로써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군사 충돌을 억제하고자 했지만 2월 24일 러시아는 끝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을 포함한 전국적인 침공에 나섰다.
러시아 금융제재, 암호화폐 활용한 우회 정황 포착
이후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국가들은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더욱 강화해 러시아 은행의 스위프트(SWIFT) 퇴출이라는 강력한 경제 제재를 추가했다. 스위프트란 전 세계 은행들의 자금 이동을 위해 만들어진 기관으로 스위프트에서 퇴출된다는 건 사실상 세계 금융시장에서 완전히 차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미국 등 서방국가에서는 러시아 주요 인사들을 비롯해 러시아 은행에 대한 가장 강력한 수준의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지만 최근 암호화폐 관련 제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2월 27일 우크라이나 부총리 겸 디지털혁신부 장관 미하일로 페도로프(Mykhailo Fedorov)는 주요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러시아 이용자들의 거래를 모두 차단하고 계정을 동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는 금융시장에서의 경제제재가 암호화폐로 인해 무의미해질 가능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스위프트에서 퇴출됐다고 하더라도 암호화폐를 통해 경제 제재를 우회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러시아에서는 러시아의 법정화폐인 루블(RUB)의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암호화폐 등으로 자산을 이동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다. 글로벌 암호화폐 거래소인 바이낸스(Binance)에 따르면 루블화로 거래된 암호화폐 거래량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급격하게 늘어났다.
평소 루블화 마켓의 암호화폐 하루 평균 거래량은 1100만 달러(약 132억 4000만 원) 수준이었지만 경제 제재로 인해 러시아가 스위프트에서 제외된다는 소식이 나온 이후 루블화 마켓의 암호화폐 평균 거래량은 3580만 달러(약 431억 원) 수준으로 급격하게 상승했다.
주요 암호화폐 거래소 “일반 국민, 거래 차단 안 해”
러시아가 암호화폐를 활용해 금융제재를 우회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동시에 실제로 그러한 정황이 포착됐지만 바이낸스와 코인베이스(Coinbase) 등 주요 암호화폐 거래소에서는 러시아 국적의 일반 이용자들에 대해서는 거래를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바이낸스는 지난 2월 28일 “제재의 대상이 되는 인물에 대해선 암호화폐 거래소 이용을 차단하겠지만 일반 이용자는 차단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암호화폐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더 큰 금융 자유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며 “러시아 국민들의 암호화폐 접근을 차단하는 것은 암호화폐 존재 이유에 반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코인베이스 역시 3월 1일, 러시아 이용자들에 대한 전면 금지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밝히면서 “러시아의 모든 이용자들을 차단하는 것은 국민들에 대한 처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암호화폐 거래소 크라켄(Kraken)의 경우 “법적 제재 없이 거래 차단이라는 조치를 취할 순 없다. 하지만 러시아 이용자들은 법적 제재가 임박했음을 인지해야 한다”면서 지금 당장 러시아 이용자들에 대한 일괄적인 거래 차단은 불가하다고 밝혔다. 특히 제시 파월(Jesse Powell) 크라켄 최고경영자(CEO)는 “우리는 정부나 정치적 파벌보다는 개인의 필요성에 집중하고 있다. 국민의 돈은 전쟁을 위한 무기가 아닌 평화를 위한 무기”라며 러시아 국민 모두의 계정을 차단하는 것에 대해 우회적인 비판을 내놓았다.
암호화폐 통한 제재도 고려 중
거래소들이 러시아 일반 계정에 대한 차단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의회 등 전 세계 정치권에서는 여전히 러시아에 대한 암호화폐 제재를 주장하고 있다. 3월 2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의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 상원 의원과 민주당 의원들은 미 재무부에 암호화폐 업계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준수하도록 촉구했다.
실제로 미 재무부는 비트코인(BTC)나 이더리움(ETH)과 같은 주요 암호화폐를 대상으로 하는 제재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3월 2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조 바이든(Joe Biden) 행정부는 러시아의 경제 제재의 일환으로 암호화폐 제재를 고려하고 있다. 이와 함께 암호화폐 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이 끼치지 않을까 함께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WSJ은 미국의 규제 기관이 암호화폐에 대한 관리 감독을 강화하면서 특정 국가나 특정 법정화폐에 대한 암호화폐 거래 차단을 요청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미국 재무부의 규제 기관인 해외자산통제국(Office of Foreign Assets Control, OFAC)을 통해 제재 대상이 되는 러시아 단체의 암호화폐 거래를 추적할 수 있을 것이며 이후 러시아 루블화를 통한 암호화폐 거래를 차단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재닛 옐런(Janet Yellen) 미국 재무장관은 “암호화폐 역시 러시아 제재 대상에 포함된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뿐 아니라 EU에서도 나타났는데 브뤼노 르 메르(Bruno le Maire) 프랑스 재무장관 역시 “러시아가 제재를 회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암호화폐를 활용하려 한다”고 밝히면서 “암호화폐에 대한 러시아 제재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암호화폐 제재, 큰 효과 없을 것
하지만 일각에서는 러시아가 제재 회피를 위해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를 사용하는 것이 큰 효과는 없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CNBC는 암호화폐 시장의 규모가 실제 금융시장의 규모 대비 너무 작기 때문에 실제적인 제재 우회 수단으로 큰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이 러시아 기업 등에 가한 금융제재의 자산 가치는 1조 4000억 달러(약 1685조 원) 수준인데 암호화폐의 시가총액이 1조 9000억 달러(약 2287조 원)로 제재의 대상이 되는 모든 자산을 암호화폐로 우회하기 위해선 암호화폐 시장의 과반 이상을 구매해야 한다.
또한 주요 거래소를 포함해 대부분의 거래소에서는 암호화폐 거래에 제한이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바이낸스에서 루블화로 비트코인을 거래한다고 가정하면 한 번 거래에 최대 25만 달러(약 3억 원) 밖에 거래하지 못한다.
하루 최대 거래액도 260만 달러(약 31억 3000만 원)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실제로 가해진 금융 제재를 회피하기 위한 방안으로 암호화폐를 활용하기란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다. 게다가 거래 내역이 모두 블록체인에 기록되는 암호화폐 특성상 큰 규모의 거래가 이뤄지면 시장에서 즉시 확인할 수 있다는 점 역시 언급됐다.
이와 함께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과 같은 암호화폐에 직접 제재를 가하려 해도 다른 토큰을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며, 거래소를 제재한다면 P2P 거래 등을 통해 우회할 가능성도 있어 암호화폐에 대한 제재가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