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암호화폐)의 익명성을 이용한 자금세탁과 테러자금조달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기 위한 국제 규정 '트래블룰(Travel Rul)' 적용이 국내에서 가시화되고 있다.
원화마켓으로 합법적인 사업 운영 허가를 획득하며 한숨 돌린 국내 4대 거래소들은 발빠르게 2022년 3월 트래블룰 이행 준비에 나섰다. 빗썸, 코인원, 코빗은 국내 최초 트래블룰 솔루션 도입을 위한 공동 작업을 진행 중이다. 국내 최대 거래소 업비트는 독자적인 이행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자금 이동 규칙'이라고도 하는 트래블룰은 가상자산사업자가 자금을 이동시킬 경우 송금자와 수취자 정보를 모두 수집하고 상대 거래소와 공유할 것을 강제한다. 국제자금세탁기구(FATF)가 가상자산 산업에 기존 금융권과 동일한 수준의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 2019년 6월 발표한 가상자산사업자(VASP) 규제 권고안에서 정한 규정이다.
"국가는 자금을 보내는 VAPS가 정확한 송금인 요구 정보와 수취인 요구 정보를 획득·보관하고 이를 수취기관에 제공하는지와 수취기관이 송금인 요구 정보(일부)와 정확한 수취인 요구 정보를 획득·보관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트래블룰은 가상자산 특성 상 적용이 어려워 발표 당시 가장 우려와 반발을 샀던 규정이기도 하다. 거래소 간 정보 공유 인프라 구축은 기술적으로도 큰 부담이었다. 일각에서는 탈중앙화 거래가 활성화돼 시장이 음지화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FATF는 중간 점검과 권고를 통해 각국이 예외 없이 VAPS 규제 지침을 따르도록 압박해왔다.
이에 우리나라의 경우,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에 따라 2022년 3월 25일부터 트래블룰 시행을 의무화하게 됐다. 거래소는 이용자의 이름, 국적, 지갑 주소, 취득 원가 등 개인 정보와 거래 정보를 보관하고 100만 원 이상 자금이 이동할 경우 상대 거래소와 정보를 교환하게 된다. 트래블룰을 도입하지 않은 거래소와는 거래가 원천 금지된다.
트래블룰 서두르는 4대 거래소
국내 사업자 인가를 받은 4대 거래소들은 트래블룰 이행을 본격화하고 있다. 빗썸, 코인원, 코빗은 합작법인 ‘코드’를 설립해 트래블룰 이행에 힘을 모았고 업비트는 자체적으로 솔루션을 운영한다.
합작법인 코드는 2021년 12월 8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간담회를 열고 트래블룰 솔루션 개발 현황과 로드맵을 발표했다. 2021년 12월 솔루션의 최종 테스트를 마칠 예정이다. 거래소 적용 시기는 2022년 1월로 잡았다.
차명훈 코드 대표는 "프라이빗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효율적이고 안전한 솔루션을 구축했다"며 "은행 송금처럼 사용자가 편리하게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자금 전송 시 발생하는 입금 오류도 크게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코드는 솔루션의 확장성을 강조했다. 트래블룰을 위한 국제 표준이 수립되지 않은 만큼, 전 세계 여러 거래소, 다양한 솔루션과 연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 방점을 뒀다. 코드는 2022년부터 솔루션에 참여할 회원사도 추가 모집할 계획이다.
업비트는 2021년 6월 코드 설립 당시 참여했다가 7월 '일부 사업자의 연대가 공동 행위로 비춰질 수 있다'는 이유로 합작법인에서 나와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업비트는 두나무의 블록체인 서비스 자회사 '람다256'이 개발한 트래블룰 솔루션 '베리파이바스트'를 운영 중이며, 한빗코, 에이프로빗 등 국내 거래소와 해외 거래소, 약 20여 개 회원사를 확보한 상태다.
트래블룰, 시장에 어떤 영향 미칠까?
대형 거래소들이 실질적인 솔루션 구축과 도입에 적극 나서면서 국내 트래블룰 이행은 순항하고 있는 모습이다. 익명성, 자율성, 탈중앙성 등 시장 특성이 약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다만, 자금세탁범죄를 방지해 투자자 보호 수준과 시장 건전성 등을 개선하면서 소비자와 규제 당국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자산 유형으로서의 인식이 제고되고 산업의 제도화 측면에서도 더욱 유리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오고 있다.
물론 대형 거래소뿐 아니라 산업 전반이 표준화된 트래블룰 이행 방안을 갖추고, 해외 시장과도 매끄럽게 연결될 수 있도록 상호 운용 방안을 마련하는 등의 과제는 남아 있다. 일반 금융권 규정인 트래블룰 이식이 가상자산 시장에 안착할 수 있을지, 산업 지형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