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MC가 미국에 1천억 달러(약 147조 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히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은 잠잠해졌지만, 투자계획이 지나치게 모호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실제 투자 속도나 자금 사용처가 거의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웨이저자 TSMC 회장은 지난달 3일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한 기자회견에서 미국 내 대규모 투자를 발표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그동안 반복하던 대만 비판을 줄였고, 수입 반도체에 예고했던 관세도 당장 시행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정작 직접적인 수혜를 받을 것으로 보이는 TSMC 주가는 계속 하락 중이다. 특히 지난 1월 고점에 비해 26% 가까이 떨어졌고, 지난해 9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시장은 TSMC의 실행력에 의문을 품고 있으며, 투자 부담이 실적 악영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결과다.
TSMC는 이번 투자 계획에서 기존에 공개한 3개 외 신규로 3개 공장과 패키징 시설 2곳만 덧붙여 밝혔다. 속도나 구체적인 예산 배분은 설명하지 않았다. 이전 발표와 비교하면 이례적으로 모호한 내용이다. 예를 들어 2020년 애리조나 공장 건설 때는 착공 시기, 양산 일정, 생산 규모 모두 명확히 공개했다. 2022년과 2024년 공장 투자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장에서는 이번 1천억 달러 발표가 실제 계획이 아닌, 과거 장기 전략을 합산한 추정일 뿐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컨설팅업체 베인의 피터 한버리는 "TSMC가 원래 미국에 여러 공장을 지으려 했지만, 계획을 앞당겼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에 포함된 첨단 패키징 시설은 기존 로드맵에는 없던 것으로, 신규 투자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TSMC의 핵심 연구개발(R&D) 시설이 여전히 대만에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인텔이나 삼성전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기업이 R&D 시설 이전에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팻 겔싱어 전 인텔 CEO도 "미국에서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직접 개발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반도체 패권을 쥘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TSMC의 한 고객사 임원은 미 정부가 향후 더 큰 전략을 준비하고 있다고 봤다. 그는 “미국이 인텔에 대규모 투자를 몰아주고 공장을 완공시킨 뒤, TSMC에 시장 독점 문제를 제기하며 일부 자산을 팔라고 요구할 수 있다”며 “그게 미국의 최종 목표일 수 있다”고 말했다.
FT는 이번 발표에 대해 TSMC 측에 입장을 요청했지만, 회사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