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개발사 아톰릭스랩의 대표 겸 '한국 이더리움 사용자 그룹' 운영자인 정우현 대표는 국내 블록체인 업계 1세대로 불린다. 올해 1월 정우현 대표가 결성한 '국보DAO' 프로젝트는 국내 최초로 국보 경매에 탈중앙화자율조직(DAO)이 참여하면서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국보DAO는 경매 입찰에는 실패했지만 3일 만에 약 24억원을 모금하면서 DAO의 가능성을 보였고, 국내에서도 DAO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국보DAO를 통해 간송과 인연을 맺은 정우현 대표가 최근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간송미술관 소유의 국보 135호 '혜원전신첩'을 대체불가토큰(NFT)으로 발행한다. NFT를 발행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웹툰, 일러스트,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로의 확장을 계획하고 있다.
◇ 조선의 황금기 기록한 신윤복…NFT 통해 현대적 의미로 재생산
혜원 신윤복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풍속 화가다. 김흥도, 김득신과 함께 조선 3대 풍속화가로 불린다. 당시 신윤복은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양반 관료들의 모습을 그리면서도 기생을 소재로 전면에 내세우는 등 조선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정우현 대표는 "신윤복이 활동했던 18세기는 조선의 힘이 가장 강하고 문예의 부흥기를 맞이했던 시기"라며 "당시 양반들이 느꼈던 자부심과 문화적인 자신감을 현대적 의미로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이번 프로젝트가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사진 = 혜원전신첩 중 ‘단오풍정’ NFT / 간송미술관
동양화가 다른 그림에 비해 수명이 짧은 것도 NFT화를 결정한 이유 중 하나다. 캔버스 위에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서양화와 달리 동양화는 화선지나 비단 등에 먹과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 때문에 직사광선에 노출될 경우 작품의 변색이나 노화가 더욱 빠르게 진행된다.
정 대표는 "동양화의 경우 한 달 정도 전시를 하면 6개월 동안은 암실에 둬야 할 만큼 색이 바래는 일이 빠르다. 일종의 디그레이드(Degrade)되는 과정"이라며 "간송이 전시를 자주 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2천년 뒤에는 진짜 원본은 사라지고 색깔이 없어진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며 "간송과의 NFT 프로젝트는 역사적인 어떤 순간을 기록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혜원전신첩 NFT는 4억 화소 이상의 초고화질 디지털 이미지를 기반으로 발행됐다.
정 대표는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혜원 화첩의 이미지는 해상도가 낮아 눈동자도 잘 보이지 않는다"며 "최대한 원본에 가까운 디지털 이미지를 얻기 위해 국내에서 가장 좋은 디지털 장비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스캐닝을 진행했다"고 덧붙였다.
◇ 커뮤니티, 문화재 보호 주체 돼야
간송미술관이 소장 중인 국보를 NFT로 발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7월 간송미술관은 훈민정음해례본을 100개 한정 NFT로 발행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한국의 상징적인 문화재를 상업화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정우현 대표는 "문화재를 보호하는 일은 국가가 주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으로선 예산이나 범위가 굉장히 한정적이다"라며 "간송이 사비를 털어 수집하고 보관해온 문화재를 대가 없이 국가 소유로 전환하는 것 또한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개인적인 노력에 의한 문화재 보호도 의미가 있지만, 그 과정에서 시민들의 참여와 투명성이 보장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혜원전신첩 NFT 프로젝트는 시민들이 직접 문화재 보호와 홍보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 대표는 "문화재를 보호하고 알리는 과정에서 간송의 개인적인 노력보다 커뮤니티적인 활동이 훨씬 중요하다"며 "NFT는 이를 알리고 매개시키기 위한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웹툰, 일러스트, 드라마까지… 2차 ·3차 창작물 등 다양한 콘텐츠로 확장
금번 NFT로 발행되는 작품은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30점 중에서도 '단오풍정'이다. 단오풍정 NFT는 내달 3일 경매에 부쳐지며 나머지 29점의 작품은 순차적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원작 전체 그림과 함께 그림 속 캐릭터의 전신샷이나 얼굴, 그림에 등장하는 화로나 담뱃대 등의 사물도 NFT로 함께 발행된다.
정 대표는 "NFT가 비싼 가격에 팔릴수록 시중의 관심은 받겠지만 많은 사람이 실제 보유자가 되고 커뮤니티에 참여하긴 어렵다"며 "원작은 제대로 된 가치를 평가받기 위해 경매를 진행하고, 원작에서 뽑아낸 여러 요소들은 저렴한 가격에 판매해 많은 사람이 참여하도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진 = ‘혜원전신첩 단오풍정’의 6가지 종류 NFT. 전체 그림과 함께 원작 속 요소들도 NFT로 발행된다. / 간송미술관
전체 그림(Full Painting) NFT는 작품 당 1개씩만 발행되며 구매자에게 영인본(복제본)이 함께 제공된다. 원작에서 파생된 NFT 500개는 0.08이더리움(ETH) 가격에 블라인드 민팅(Blind Minting) 방식으로 판매된다.
내달 3일 프리세일 이후 원작의 1차 NFT를 기반으로 다양한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웹툰과 일러스트, 뮤직비디오,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 제작을 지원할 예정이다.
정 대표는 "유명한 작가뿐 아니라 일반인도 직접 공모 활동을 통해 창작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것"이라며 "생태계가 커지면서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순환적인 구조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이어 "간송이 가지고 있는 문화재는 과거와 현재의 문화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라며 "다양한 작가와 커뮤니티가 함께 참여해 협업할 수 있는 장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