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둘째주 미국 은행 3곳이 문을 닫았다. 암호화폐 기업 중심의 실버게이트 은행과 시그니처 은행, IT 성장 기업 중심의 실리콘밸리 은행이다.
은행 붕괴의 요인과 이번 사태가 다른 은행 및 경제 전반에 미칠 파장에 시장이 주목하고 있다.
◇ 최초 발화지점 '실버게이트'...암호화폐 업계 만의 문제
가장 먼저 위기가 감지된 암호화폐 산업은 은행 부실을 야기한 문제 산업으로 지목됐다.
금융권이 기피했던 2016년부터 암호화폐 업계와 긴밀히 협력해온 실버게이트 은행이 3월 1일 증권 당국에 연례 보고서(10-K)를 제출하지 못하면서 임박한 위기를 드러냈다. 은행은 소명 자료에서 추가 손실로 자본이 부족해질 수 있으며 지속적인 운영 여부도 불투명하다고 밝혔다.
은행 주가는 60% 폭락했고 코인베이스, 서클, 크립토닷컴, 갤럭시디지털, 제미니 등 암호화폐 기업 다수가 협력 중단을 선언했다.
3일 암호화폐-법정화폐 실시간 결제망 ‘SEN’ 운영을 중단했고 8일에는 결국 자발적 청산을 결정했다. 은행은 "예금 전액을 상환하고 질서있게 운영을 중단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실버게이트 은행의 위기는 암호화폐 시장의 위기로 해석됐다. 시장은 거시경제 영향권에서 분리돼 홀로 하락세를 걷기 시작했다.
암호화폐 친화적인 시그니처 은행도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다. 업계에 남은 마지막 진입 기관이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시각도 있었지만 실버게이트 위기를 재현할 수 있다는 우려가 더 컸다.
시그니처 은행은 전체 예금의 20%에 해당하는 178억 달러(한화 약 23조원)가 유출되는 뱅크런을 겪었다.
◇ 은행 줄 끊긴 암호화폐 업계 '고립' 우려
실버게이트와 시그니처 은행의 몰락은 자금 유입 길이 막히고 암호화폐 시장이 고립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실버게이트의 SEN, 시그니처은행의 시그넷 등 암호화폐 고객사를 위한 실시간 결제 플랫폼으로, 암호화폐 기업의 법정화폐 조달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었다. 두 은행이 영업을 종료하면서 암호화폐 산업의 은행 문제는 다시 부각됐다. 투자자 접근성과 기관 진입에도 장애물이 생겼다.
JP모건은 보고서를 통해 실버게이트 은행의 파산이 암호화폐 업계에 큰 좌절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봤다.
은행은 "암호화폐 거래소가 달러 입출금 처리 네트워크를 변경하는 건 어려운 작업"이라면서 "실버게이트 파산은 빠르고 효율적인 입출금 시스템에 의존하는 암호화폐 업계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라고 진단했다.
모건스탠리는 보고서에서 "실버게이트는 당국 인가 은행으로서 암호화폐 거래소에 서비스를 제공하며 암호화폐 산업 성장의 중심에 있었다"며 "미국에서 법정화폐를 암호화폐로 전환하는 길이 막혔다. 규제 당국이 다른 루트를 폐쇄할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
◇ 금융 시장에 불 지른 건 '암호화폐' 비판에 탈은행화 우려까지
암호화폐 친화적인 은행들이 문을 닫으면서 위험 자산인 암호화폐를 취급한 것이 문제였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그에 따른 규제 강화가 예상됐다. 소위 탈은행화(de-banking)가 우려되는 부분이다.
금융위기 재발을 막기 위한 '도드-프랭크법(Dodd-Frank Act)'을 입안한 바니 프랭크(Barney Frank) 전 하원의원은 12일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실패한 은행들의 공통 분모는 '암호화폐'라고 발언했다. 2010년 7월 금융개혁법 '도드-프랭크법'을 만들 때 놓친 '암호화폐'가 금융 시스템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은행을 무너뜨렸다는 주장이다.
마이클 베넷(Michael Bennet) 상원의원은 16일 상원 재무위원회 청문회에서 "암호화폐 산업은 금융권에서 격리된 마리화나 산업보다도 불안정하다"면서 안전하고 건전해야 할 예금기관이 암호화폐를 취급하는 것이 적절치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시그니처 은행 예금 20%가 암호화폐 산업과 관련돼 있었다"면서 "은행은 누구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자산 가치가 치솟았다가 폭락하는 암호화폐에 20%를 투자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은행 폐쇄는 은행과 암호화폐 기업 간 접점을 없애려는 정부 노력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시그니처 은행 이사이기도 한 바니 프랭크 전 하원의원은 은행 폐쇄가 암호화폐 취급이 위험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본보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암호화폐 패닉에 대규모 인출이 발생했지만 12일 이미 안정화됐었다"면서 "은행을 닫을 만한 타당한 이유가 없었는데 당국은 폐쇄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프랭크 전 의원은 "당국이 암호화폐 취급이 위험하다는 반(反) 암호화폐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은행을 폐쇄한 것"이라면서 "은행이 암호화폐를 다뤄선 안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통화감독청(OCC) 청장 대행을 지낸 브라이언 브룩스(Brian Brooks)는 바이든 정부가 은행 시스템에서 암호화폐를 분리해내고 있다고 확신했다.
OCC 전 청장 대행은 3월 15일 코인데스크와의 인터뷰에서 "정부는 암호화폐가 본질적으로 위험하다고 보고, 은행 시스템에서 분리해야 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규제 기관마다 상황이 다른데 암호화폐 취급 은행을 폐쇄하는데 모두 협력하고 있다"면서 "이런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제이슨 브렛 전 미국 FDIC 감독관도 3월 17일 "미국 규제 당국이 최근 금융 업계에서 발생한 이슈를 이용해 암호화폐 기업을 은행 시스템에서 쫓아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미국 암호화폐 로비 그룹 블록체인협회(Blockchain Association)는 17일 은행이 특정 산업군 기업 계좌를 동결하는 관행인 '탈은행화(Debanking, 디뱅킹)'이 암호화폐 산업에서 이뤄지고 있는지 정보를 요청한 상태다.
시그니처 은행을 폐쇄한 뉴욕 금융감독국은 이번 결정이 예금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며 암호화폐와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애드리안 해리스(Adrienne Harris) 감독관은 "시그니처는 암호화폐 부문으로 국한되지 않는 광범위한 예금자 기반을 가지고 있다"면서 "은행이 안전하고 건전한 방식으로 사업을 수행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 때문에 폐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예금보험공사(FDIC)가 은행 인수자에 암호화폐 사업 포기를 요구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당국은 "인수 조건에 별도의 서비스를 금지·제한한다는 내용이 없으며, 은행이 인수를 위해 암호화폐, 암호화폐 사업을 매각하는 것을 요구할 계획도 없다"며 이를 전면 부인했다.
◇ '문제적' 암호화폐 근절 위해 휘몰아친 규제 폭풍
당국 공식과 관련 없이 디뱅킹 논란과 우려가 불거진 이유는 은행 사태 이전부터 은행권에서 암호화폐를 배제시키려는 규제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국은 지난해 테라·루나 붕괴와 FTX 파산 당시 "암호화폐 노출 수준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영향이 크지 않았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암호화폐가 금융권에 침투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연초 연방예금보험공사(FDIC)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미국 136개 은행이 암호화폐 사업을 계획 중이거나 이미 추진 중이다. 당국은 암호화폐 서비스 수요 증가세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작년 6월 말 기준 기본 자본이 30억 이상인 글로벌 은행 17곳이 암호화폐 익스포저(리스크 노출 금액, 약 4조원)가 있거나 암호화폐를 수탁(약 1조3951억원) 중이라면서 "전체 은행 표본의 20%가 암호화폐를 수용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당국은 암호화폐 취급 은행을 은행권 밖으로 밀어내며 경계 수위를 높여왔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 연준)과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통화감독청(OCC)은 1월 3일 공동 성명을 통해 암호화폐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은행이 취급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월 27일에는 와이오밍 주에서 인가를 받은 암호화폐 전문 은행 '커스터디아'의 연준 가입 신청을 반려했다. 암호화폐 취급을 반려의 주요 사유로 거론했다.
연준은 "암호화폐 연계 사업 모델은 안전하고 건전해야 할 은행 관행과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또한 "위험 관리 체계 역시 자금세탁·테러 자금조달 같은 암호화폐 관련 우려를 해소하기에 불충분했다"고 평했다.
2021년 초 우호적인 브라이언 브룩스 전 청장 대행 하에 OCC에서 조건부 승인을 받았던 암호화폐 은행 프로테고(Protego) 역시 3월 20일 조건 불충족으로 자격을 상실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2월 15일 투자자문사의 자산 수탁 규정을 '암호화폐'로 확대하면서 암호화폐 기업을 수탁 기관으로 이용할 수 없도록 제한 조치에 나섰다. 게리 겐슬러 SEC 위원장은 노골적으로 "암호화폐 기업은 안전한 수탁기관일 수 없다"면서 "암호화폐 기업을 이용하는 실수를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프랭크 차파로(Frank Chaparro) 더블록 편집장은 "미 당국이 개입하면서 암호화폐 스타트업이 은행 서비스를 받을 가능성은 희박해졌다"면서 "암호화폐 자본 시장은 2014년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17일 빌 해거티(Bill Hagerty) 미 상원의원도 "미국 은행들이 정치적 압력을 받아 암호화폐 기업 거래를 제한하고 있다고 들었다"면서 "은행을 합법적인 '기업 때리기'를 위한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선 안 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국제적인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전통 금융권과 암호화폐를 '단절(斷絶)'하기 위한 규제 움직임은 이미 진행 중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주요 20개국(G20)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암호화폐가 대중이 활용 가능한 기술 개발에 기여한 점은 인정하지만 광범위한 암호화폐 확산은 통화 정책, 환율 관리, 재정 지속성에 대해 막대한 위험을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BIS는 은행의 암호화폐 취급 리스크를 제한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16일 암호화폐 익스포저를 2% 미만으로 제한하는 최종 건전성 기준을 발표하고 2025년 1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가기로 합의한 상태다.
◇ 실리콘밸리 銀 초고속 파산, 경기침체 도화선 될까
이달 10일 미국 16위 상업은행 '실리콘밸리 은행'이 이틀 만에 폐쇄되면서 유동성 위기는 모든 시장과 산업이 직면한 공통의 문제가 됐다.
3월 8일 실리콘밸리 은행은 10년 만기 국채 등으로 구성된 210억 달러 상당의 증권을 18억 달러의 손실을 보고 매각했다는 사실과 유상증자를 통해 22억 달러 이상의 자본 조달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현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실리콘밸리 은행 주가는 장중 60% 떨어지고 시간외거래에서 20% 더 하락하다 결국 거래가 정지됐다. 뱅크런이 발생해 자금 조달 계획은 무산됐고, 이후 추진한 은행 매각 시도는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미국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국은 10일 '유동성 불충분과 지급 불능'을 이유로 실리콘밸리 은행을 폐쇄하고 FDIC를 예금 지급 및 자산 매각 업무를 처리하는 파산 관재인으로 세웠다.
은행의 총 자산 규모는 2090억 달러(한화 약 276조원), 예금 규모는 1754억 달러(한화 약 232조원)이다. 2008년 금융위기에 파산한 '워싱턴 뮤추얼'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특히 미국 신생 기업 절반 이상과 거래 관계가 있어 은행권뿐 아니라 기업 부문 도산과 경기침체까지 촉발할 수 있었다.
위기를 감지한 시장은 폭락하기 시작했다. 은행 관련주 낙폭이 컸다. 팩웨스트뱅코프는 40%, 퍼스트리퍼블릭 은행, 웨스턴 얼라이언스 뱅코프는 60% 이상 밀려났다.
시장 공포감을 잠재우기 위해 재무부, 연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등 책임기관들은 주말 사이 대책 마련에 나섰고, 개장 전인 12일 문제 은행 예금 전액을 상환하겠다고 발표했다.
당국은 "모든 예금자의 자금을 완전히 보호할 방침"이라면서 "은행 파산에 따른 손실을 납세자가 부담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준은 예금자 자금을 보호하기 위해 위기 은행에 최대 1년 동안 대출을 제공하는 250억 달러 규모의 긴급 자금 지원 프로그램(BTFP)을 신설했다.
미국 국채 등 은행이 보유한 적격 자산을 담보로 연준이 자금을 수혈해주는 방식이다. 은행은 긴급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즉시 처분 시 손실이 확정되는 우량 증권을 헐값에 처분할 필요가 없게 됐다.
이날 뉴욕주 금융서비스국이 시그니처 은행을 폐쇄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은행 총 자산 규모는 1104억 달러(한화 약 146조원), 예금 규모는 886억 달러(한화 약 117조원)이다.
당국은 은행권이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금융위기 이후 개혁을 통해 은행 시스템이 상당히 안전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기업과 가계에 예금과 대출을 제공하는 은행 역할을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주주나 일부 무담보 채권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문제가 제기된 2008년의 '구제금융'과 차별점을 두려 했다.
FDIC는 부실금융기관을 정리하기 위한 브리지은행을 신설하고 부실은행의 모든 예금을 이체했다. 연준은 은행 감독과 규제에 허점이 있었는지 조사 중이며 향후 중형은행에 대한 엄격한 자본 및 유동성 요건, 스트레스 테스트 진행 등 강화 조치도 준비 중이다.
◇ 잡히지 않는 불씨...크레디트스위스·퍼스트 리퍼블릭 은행
당국이 급히 리스크 전염을 막았지만 이곳 저곳에서 문제가 새어나오고 있고, 시장은 여전히 불안한 상태다.
미국에선 14위 퍼스트리퍼블릭 은행 부도설이 돌았다. 은행에서 약 890억 달러(한화 약 116조원)의 자금이 빠져나간 것으로 추정됐다.
퍼스트리퍼블릭 은행 위기에는 미국 11개 대형 은행이 총 300억 달러(약 39조원)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16일 JP모건체이스·뱅크오브아메리카·시티그룹·웰스파고가 각각 50억 달러를,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는 각각 25억 달러를, BNY멜론·PNC뱅크·스테이트스트리트·트루이스트·US뱅크는 각각 10억 달러의 긴급 자금을 대기로 결정했다.
미국이 은행 문제를 수습하는 가운데 유럽발 은행 위기도 터졌다. 3월 15일 은행 최대 주주 사우디아라비아 국립은행이 규제 문제로 추가 자금 지원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 불씨가 됐다.
은행 주가는 24.24% 하락하며 1.70 CHF까지 밀려났고, 거래량이 급증해 여러 차례 거래가 중단되기도 했다. 영국 HSBC,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럴과 BNP파리바, 독일 도이치 은행, 코메르츠 은행 등 전 세계 은행주가 급락 반응했다.
167년 역사의 스위스 2대 크레디트스위스는 여러 스캔들에 휘말리며 대규모 고객 이탈과 자금 유출을 겪고 있었다. 지난 4분기에 고객 자산 약 120억 달러(한화 약 15조7620억원) 상당이 빠져나간 상태다.
시장 상황이 악화하자 스위스 국립은행(SNB)은 "크레디트 스위스의 현재 자본 상황은 양호하며 유동성 요건을 충족하고 있다"면서 "필요한 경우 개입할 것"이라고 시장을 안심시켰다.
주말이었던 19일 스위스 1위 은행 UBS가 크레디트스위스를 전격 인수하면서 시장 붕괴 위험을 막았다. 인수 금액은 32억3000만 달러(한화 약 4조2억원)이며 스위스 국립은행이 이번 인수 지원을 위해 최대 1000억 달러(한화 약 130조원)의 유동성 지원을 제공하게 된다.
◇ "전형적인 전통 은행의 문제" 비판도
정부 당국은 신속한 대응을 통해 추가 뱅크런을 방지했지만, 암호화폐 산업을 향했던 화살이 은행 산업과 정부 당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암호화폐에 노출된 사실뿐 아니라 사업 다각화 실패, 만기 관리 소홀 등 전통 은행의 전형적인 리스크가 원인이라는 주장이다.
실버게이트, 실리콘밸리, 시그니처 은행은 특정 산업과 우호적인 관계를 통해 물 들어올 때 큰 이익을 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업 모델과 고객층이 특정 지역이나 특정 업계로 한정됐다는 점은 약세장에 큰 리스크가 됐다.
실버게이트 은행은 암호화폐 기업을 고객사로 흡수한 덕분에 암호화폐 강세장에서 혜택을 톡톡히 누렸지만 약세장 충격 역시 피할 수 없게 됐다.
특히 FTX 파산 이후 81억 달러(한화 약 10조원) 규모의 인출 파동을 겪은 후 위태롭게 운영을 이어왔다. 당국 조사부터 집단 소송까지 규제 압력도 거셌다.
최근 3개월 동안 실버게이트 은행에서 전체 예금 중 68%가 빠져나갔다. 이에 대응하면서 주 정부 채권, 모기지 증권을 처분했고, 2013년부터 현재까지 누적 이익보다 큰 7억1800만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알려졌다.
시그니처 은행은 FTX 관련 집단소송에 휘말리면서 암호화폐 산업에는 '예금' 업무만 지원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관련 규모도 100억 달러(한화 약 13조원)에서 80억 달러(한화 약 11조원)로 감축 중이라며 이미 암호화폐 산업과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관련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실리콘밸리 은행은 2019~2021년 벤처투자금이 쏟아졌던 성장주 IT 기업을 주고객 기반으로 뒀다. 신생 기업 절반 이상과 거래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자금조달이 수월했던 기업들이 투자금을 실리콘밸리 은행에 예치하며 호황을 누렸다. 저금리과 풍부한 유동성 상황에 대출할 곳이 마땅치 않던 은행은 장기 국채에 자금을 투입했다. 은행 자산의 절반가량이 국채 형태로 보관돼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당국이 물가를 잡기 위해 강력한 통화 긴축에 들어가면서 벤처 투자 시장과 성장 산업이 모두 크게 위축됐다. 대출과 투자 모두 어려워진 기업들은 은행에 예치했던 자금을 찾아 쓰기 시작했지만, 은행은 자금이 장기 국채에 묶여 있어 집행할 현금이 점차 고갈됐다.
◇ "예견가능했던 문제, 당국 감독 소홀" 지적도
이번 은행 실패에 대해 금리인상이 국채 등 증권 가치를 지속적으로 잠식하며 예금 기반 자산 운영에 악영향을 준 만큼 당국이 예견 가능한 위험을 간과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현금 지원 의무가 있는 예금기관이 10년 만기 증권에 투자하는 등 적절한 감독 규제가 부족했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켄 그리핀(Ken Griffin) 헤지펀드 시타델 CEO는 "실리콘밸리 은행 사태의 전조를 읽지 못한 규제 당국은 운전대를 잡은채 졸고 있던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캐시 우드(Cathie Wood) 아크 인베스트먼트 CEO는 "단기금리가 1년 만에 19배나 치솟고 은행 예금이 1920년대 이후 처음으로 전년 대비 감소하는 등 자산·부채 듀레이션(채권의 자금이 회수되는 평균만기) 미스매치라는 위기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면서 "은행 붕괴 원인은 암호화폐가 아닌 연준의 잘못된 정책"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규제 당국은 중앙화된 단일 장애지점 없는 탈중앙화, 투명, 감사 가능한 금융 플랫폼을 차단하는 대신, 기존 은행 시스템에 존재하는 중앙화되고 불투명한 단일 장애지점에 집중했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구제 방식 역시 당장의 뱅크런을 피했을 뿐 재무건전성 등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왔다.
켄 그리핀 시타델 CEO는 "실리콘밸리 은행에 대한 규제 당국의 구제금융 움직임은 미국의 자본주의가 우리 눈 앞에서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SVB 예금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재정 규율'을 무너뜨리는 행위"이며 "이같은 구조 패키지는 은행들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명 헤지펀드 투자자 빌 아크만(Bill Ackman)은 "실리콘밸리 은행발 금융권 위기에 미국 규제 당국이 개입했지만 더 많은 은행들이 파산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부분지급준비금제도에 따라 자본금의 5~10%에 해당하는 준비금만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은행들이 뱅크런에 취약한 상태라는 진단이다. 최근 한 논문은 186개 은행이 현재 실리콘밸리와 비슷한 상황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빌 아크만은 "물론 당국이 조치를 내놓지 않았다면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서는 옳은 조치를 취한 것이지만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들이 그 결과를 온전히 책임지게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옳지 못한 일을 했다"고 지적했다.
캐시 우드는 "미국 규제 당국이 암호화폐를 금융 규제 실패의 희생양으로 삼았지만, 미국 은행 시스템이 지역 은행을 위협하는 뱅크런에 대응하는 동안 비트코인, 이더리움, 기타 암호화폐 네트워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며 "오히려 은행 시스템의 불안정성이 디파이 진입로인 스테이블코인을 위협했다"고 지적했다.
작년 테라루나, FTX, 쓰리애로우캐피털 등 암호화폐 붕괴가 전통 금융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했지만 이번에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실리콘밸리 은행의 실패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스테이블코인 USDC 발행사 '서클(Circle)'이다. 10일 서클은 준비금 8%에 해당하는 33억 달러(4조 3098억원)를 실리콘밸리 은행에서 인출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1달러를 유지해야 하는 USDC 가격은 0.88 달러 수준까지 벌어졌다. 9일과 10일 급증한 상환 요청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주말 동안 상환을 중단했다.
규제 이행 및 탄탄한 준비금 자산 구성을 통해 가장 안전한 스테이블코인으로 평가받은 USDC가 신뢰를 잃으면서 메이커다오의 DAI, 바이낸스USD(BUSD) 같은 다른 스테이블코인 역시 달러 연동이 깨졌다.
정부의 은행 대책이 나온 이후 USDC는 다시 반등해 13일 이후 0.99 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시총은 430억 달러(한화 56조원)에서 384억 달러(한화 약 50조원) 수준까지 크게 감소했다.
제레미 알레어(Jeremy Allaire) 서클 CEO는 "모든 이들이 암호화폐로부터 은행을 보호할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서클은 은행으로부터 암호화폐를 보호하기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캐롤라인 힐(Caroline Hill) 서클 글로벌 정책·규제전략 총괄도 "최근 일어난 일은 암호화폐에서 전통 금융으로 확산된 것이 아닌 전통 금융에서 암호화폐로 옮겨진 것"이라며 USDC가 은행 산업에 의존하는 모델이었기 때문에 발생했음을 언급했다.
이처럼 은행 산업에 대한 신뢰도가 악화하면서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14일 미국 전체 은행 시스템에 대한 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조정했다.
신용평가사는 "최근 실리콘밸리은행(SVB)을 비롯한 미국 중소 지역은행의 잇따른 붕괴를 고려해 등급을 낮췄다"면서 "미국 은행의 경영 환경이 급속도로 악화하고 있다는 점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해결 안 된 '물가'와 빠르게 번진 '경기침체'
은행이 경제금융 환경이 극적으로 변하면서 시장을 쥐락펴락했던 물가 문제까지 무대 중심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경기침체는 물가보다 더 급하고 심각한 현실이 됐다. 물가를 잡기 위한 막무가내 금리인상이 문제였다며 '통화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당국은 은행 문제가 터지기 직전까지만해도 경기침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물가 잡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금리를 8차례 인상해 4.50~4.75%까지 끌어올렸지만 물가와 고용 모두 탄탄했기 때문에 연준 의장은 7일과 8일 상하원 청문회에서 매파적 발언을 내놓으면서 3월 FOMC 빅스텝 및 최종 금리 5.75% 가능성이 열렸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8일 물가가 다시 치솟지 않도록 조기 금리 인상 완화를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미국과 유럽 경제가 놀라울 정도로 회복력이 있다는 점이 입증됐다"면서 "올해 글로벌 경기침체 카드는 없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은행권 위기는 금융위기를 촉발했던 리먼브라더스 공포를 연상시켰고, 그간 통화 정책과 시장 방향을 결정짓던 고용·물가 지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미국 2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6.0%로 예상 범위 안에 들어왔고, 생산자물가지수(PPI)나 고용 보고서에서도 긍정적인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 있었지만 시장은 은행 위기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금융 시스템이 취약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신호가 잡히면서 빅스텝 가능성은 사라졌다. 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금리동결 가능성을 40.2%, 0.25%p 인상은 59.8% 수준을 가리키고 있다.
씨티그룹 등은 연준이 금리인상을 중단할 가능성이 적다고 말했지만, 골드만삭스, 바클레이즈 은행 등은 연준이 3월 FOMC에서 금리를 동결하고 이후 긴축 정책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펙 오즈카르데스카야(Ipek Ozkardeskaya) 스위스쿼트(Swissquote) 수석 애널리스트는 보고서에서 "가파른 금리 인상으로 인해 은행권에 발생한 문제를 연준이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며 "물가상승률을 2%로 되돌리기 위해 금융 위기를 촉발할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 은행 사태가 충분히 반영되기 전에 집계된 미시건대 소비자심리지수도 경기둔화를 가리켰다.
소비자심리지수는 전월 67.0에서 3.6p 내린 63.4로 집계됐다. 4개월 만에 첫 하락 움직임이다. 현재 여건 지수는 전월보다 4.3p 내린 66.4, 미래 전망을 나타내는 기대지수 역시 3.2p 하락한 61.5로 집계됐다. 1년 기대 물가상승률은 전월 4.1%에서 3.8%로, 5년 기대 물가상승률은 2.9%에서 2.8%로 소폭 하락했다.
일본 투자은행 노무라는 연준이 기준금리를 0.25%p 인하하고 양적긴축(QT)을 종료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놨다.
은행은 "연준이 금리를 내린다면 시장은 이를 빠르게 가격에 반영할 수 있다"면서 "추가 뱅크런 위험과 미실현 자본 손실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무라는 연준이 양적 긴축 또한 중단할 것으로 예상했다. 애널리스트들은 "양적 긴축 종료는 지급준비금 규모를 더 충분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 비트코인, 금융위기 속 해답될까
은행이 흔들리고 당국은 진화에 나서는 기간 동안 비트코인은 금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반등했다. 20일 새벽 한때 2만8408 달러까지 올라 7개월 최고점을 기록했다.
오후 1시 기준 토큰포스트마켓에 따르면 비트코인은 한주 동안 22.76%, 올 들어 64% 상승한 2만7449 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경기침체로 이어질 수 있는 은행 붕괴 상황에서 2008년 금융위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온 비트코인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암호화폐 위기에 '스테이블코인'으로 움직였던 자금은 은행 위기를 피해 다시 비트코인으로 이동했다.
연준이 피벗(pivot, 정책 전환)을 결정한 건 아니지만 이번 BTFP 및 재할인창구 등을 통해 시장에 양적완화 모드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 역시 유동성에 민감한 비트코인 가격에 상승 요인이 되고 있다.
암호화폐 데이터 제공업체 카이코(Kaiko)의 애널리스트 데시슬라바 오베르(Dessislava Aubert)는 CNBC에 "비트코인은 유동성에 매우 민감한 자산인데 유동성 전망이 개선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데이터에 따르면 연준 자산은 3000억 달러 증가했다"면서 "은행에 대한 추가 자금 지원 프로그램 BTFP 신설은 직접적인 양적완화는 아니지만, 본질적으로는 은행 시스템에 유동성을 주입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중국에서도 은행 지급준비율을 낮춰 유동성을 추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가지표만 따라가면 됐던 이전과 달리 시장 방향을 예측하는 건 더 어려운 상황이다. 금리인하에 대한 기대로 인한 단기 반등은 심각한 경기침체 공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는 우려도 남아있다.
한편, 많은 암호화폐 업계 인사들은 암호화폐 시장이 강세장에 왔다는 낙관적인 주장을 내놓고 있다.
마이크 노보그라츠(Mike Novogratz) 갤럭시디지털 CEO는 "글로벌 경제 환경이 비트코인에 상당한 기회를 주고 있다"면서 "최근 미국 은행 위기는 안전자산으로 여겨지는 비트코인 가격 상승에 기여했다"고 말했다.
이어 "전세계 경기 침체와 신용 경색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면서 "연준이 금리인상을 멈추고 결과적으로 비트코인, 이더리움에 도움이 될 심리학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조셉 테텍(Josef Tetek) 트레저(Trezor) 애널리스트는 최근 비트코인 반등이 실리콘밸리 은행 붕괴로 인한 직접적인 결과라고 해석했다.
그는 "은행의 위기로 비트코인이 안전한 피난처이자 위험 회피 자산으로 부상할 수 있다"면서 "지난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만들어진 비트코인이 이번 은행권 구제금융에 반발하는 사람들을 결집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서 헤이즈 비트멕스 설립자가 트위터를 통해 "미 연준의 긴급 대출 프로그램은 코로나19 이후 가장 중요한 금융 이벤트"라며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암호화폐 강세장이 찾아올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연준의 금리 동결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비트코인, 금 등의 자산이 수혜를 입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블룸버그 통신도 19일 "비트코인이 글로벌 금융위기의 피난처로 급부상함에 따라 올 들어 70% 폭등했다"면서 "만약 연준이 금리를 동결하면 3만 달러를 돌파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캐시 우드는 "탈중앙화된 투명한 감사가 가능한 암호화폐 생태계에서는 전통 은행과 같은 붕괴는 불가능하다"면서 "암호화폐는 오히려 기존 금융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