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암호화폐 자율규제 실험이 실패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18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즈는 "일본이 산업을 통해 시장을 감독하는 '자율규제' 실험을 진행했지만, 기대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장 관계자들은 △비효율적인 규제 방식 △만성적인 자원 부족 △당국과 자율규제기관 간 입장차 △내부 갈등 등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 좋은 의도, 빠른 시작
일본은 암호화폐 거래소가 급증하고 젊은 층을 중심으로 암호화폐 투자 붐이 일면서, 2017년 세계 최초로 암호화폐를 '금융 자산'으로 인정했다.
관련 규제를 선도하고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거래소 인가 제도도 도입했다. 당시 거래소에서 발생한 잇따른 대형 해킹 사고도 암호화폐 규제를 서두른 이유 중 하나였다.
일본 당국은 신생 산업을 신속하고 유연하게 규제하기 위해 업계가 직접 시장을 감독하고, 자체적인 규제 방안을 강구하는 '자율규제' 방식을 채택했다. 당국 자원이 한정된 만큼, 자율규제협회가 시장을 관리하고, 시장 변화에 발맞춘 역동적 정책을 내놓을 것을 기대했다.
2018년 조직된 '일본암호화폐거래소협회(JVCEA)'는 암호화폐 자율규제기관으로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현재 허가받은 32개 거래소가 회원사로 활동 중이다.
◇ 시장 흐름 못 맞춘 정책
일본이 암호화폐 규제를 수립할 당시, 시장은 위험성을 제거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고, 까다로운 인가 및 상장 심사 절차를 도입했다. 이는 시장이 호황을 맞은 지난 해 현지 시장이 활성화되는 것을 방해했다.
일본 금융청(FSA)에서 상장 심사 권한을 넘겨받은 JVCEA는 신생 거래소가 암호화폐를 상장할 때, 신규 암호화폐 뿐 아니라 유명 암호화폐에 대해서도 엄격한 심사 절차를 진행했다. 상장 심사에 6개월에서 1년 기간이 소요되면서 2021년 10월 기준 심사 대기 건이 80건을 넘기도 했다.
경직된 접근 방식 때문에 일본 암호화폐 시장이 2021년 상승장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다른 나라 암호화폐 시장과도 상당히 격차가 벌어진 상태다. 2021년 말 기준 미국 코인베이스가 지원하는 암호화폐는 총 139종인데 비해, 일본 전체 거래소가 상장한 암호화폐는 40종에 그쳤다.
JVCEA는 올초 심사 절차를 가속화하기 위해 이미 유통 중인 암호화폐에 대한 심사를 생략하는 '그린리스트' 제도를 논의했으며, 지난달에는 상장 심사 자체를 폐지하고 상장된 암호화폐를 관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 협회 내부 갈등...노동조합 결성까지
산업 규제 및 협회 운영 방식을 두고 협회 내부에서도 불협 화음이 생기고 있다.
한 관계자는 "대부분 은행, 증권사, 정부기관에서 은퇴한 사람들이 JVCEA를 운영하고 있다"면서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고 비판했다. 일부 직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해 협회 최고위 인사의 퇴출 등을 요구하고 있다.
대형 거래소 코인체크의 사토시 하스오 사장이 JVCEA 협회장을 맡고 있는 가운데, 일각에선 상장 심사 지연이 코인체크 같은 기성 거래소와 경쟁할 수 있는 신생 거래소에 불이익을 줬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다.
이에 대해 JVCEA는 "숙련된 직원이 부족해 심사 과정이 지연돼 신규 회원사에 불편을 초래한 점을 인정한다"면서도 "의도적으로 기존 회원사에 편향된 조치를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 당국과 협회 간 갈등
일본 금융 당국과 협회 간 규제 입장차도 자율규제 체제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JVCEA가 규제 유연화 방안을 모색하고 있지만, 일본 금융청은 JVCEA의 시장 감독이 부실하다면서 규제 강도를 강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파이낸셜타임즈가 입수한 지난해 12월 회의록에 따르면 금융청은 두 차례의 회의에서 JVCEA에 자금세탁방지 규제 도입 지연 등에 대해 경고했다.
야나가 마사오 금융청 이사는 "당국은 자금세탁방지 규정 마련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지만, 협회가 해당 작업을 진행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JVCEA는 신속하게 움직일 자원이 부족하다"면서 "암호화폐 거래소들은 규모가 작은 사업자들인 만큼 높은 규제 수준을 이행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거래소 간 고객 데이터 공유에 대한 국제적 합의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거래소들은 규정을 만들어도 현실적으로 시행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