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가 현실이 되고 있다. 유럽 주요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CBDC 발행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스위스는 이미 CBDC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싱가포르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통해 CBDC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팬데믹이 촉발한 디지털 전환 가속화와 현금 사용 급감, 대안적인 민간 디지털 화폐의 등장 등에 전 세계 중앙은행들이 CBDC라는 같은 방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뛰고 있다.
英 중앙은행-재무부, 2021년 CBDC 발행 결정키로
2021년 11월 9일(현지시간) 로이터에 따르면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과 영국 재무부는 2022년 CBDC 발행 가능성을 평가하기 위해 공식 협의에 들어간다. 당국은 설계적 특징, 이점, 시사점 등을 조사하고 논의할 계획이다.
CBDC 발행 여부는 아직 미정이다. 당국은 CBDC가 실제 발행까지 수년이 걸리는 국가의 대형 프로젝트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영란은행은 "CBDC 발행과 관련해 결정된 것이 없다"면서 "발행 시점은 빨라도 5~10년 사이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은행은 CBDC를 발행하더라도 현금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현금과 공존하는 구조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영란은행과 재무부는 CBDC 발행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CBDC 사례를 평가한 보고서를 준비할 계획이다. 제안된 모든 CBDC 개념 설계들을 연구해 기술 사양을 파악하고, 최적의 설계 모델과 실행가능성에 대한 심층 실험을 진행하게 된다.
존 글렌(John Glen) 재무장관은 "소매용 CBDC는 일반 대중과 기업이 일상 결제 수요에 따라 사용하게 될 것이며, 영국이 금융 부문의 혁신과 기술의 최전선에 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중앙銀 "도매용 CBDC, 효과적 결제 수단"
프랑스 중앙은행은 기관이 사용하는 '도매용 CBDC'가 효과적인 결제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결론을 내놨다. 도매용은 소매용과 달리 기관 간 결제 처리에 사용된다. 일반 대중에게 제공되는 소매용 CBDC는 풀어야 할 과제가 많지만, 도매용 CBDC는 보다 즉각적인 도입을 통해 실제적인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된다.
프랑스는 2021년 11월 8일 도매용 CBDC 시범 운영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며 이 같은 입장을 밝혔다. 프랑스는 시중 은행, 기술 회사, 공공 기관 등과 협력해 2020년 3월 시범 운영 실험을 시작했다. 9건의 실험을 진행해 이 중 7건을 마무리한 상태다.
프랑스 중앙은행은 "이번 실험을 통해 국경 간, 통화 간 결제, 유가증권 결제 등 도매용 결제에 CBDC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했다"며 "도매용 CBDC는 다양한 분산원장기술(DLT) 유형을 통해 구현할 수 있으며, 효과적 결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만 "CBDC가 통화 정책 전달 및 금융 중개 기관의 역할에 미치는 영향 등은 추가 검토가 필요한 과제"라면서 "이 때문에 중앙은행이 도매용 CBDC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프랑스는 유럽중앙은행의 디지털 유로 프로젝트를 통해 소매용 CBDC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2021년 7월 CBDC 연구를 위한 2개년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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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2022년 1월부터 CBDC 사용 가능"
스위스의 CBDC 작업은 연구 단계를 넘어 실사용 가능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 국립은행은 2022년 1월 도매용 CBDC를 사용할 수 있는 기술적 준비를 완료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지 규제 당국에서 라이선스를 취득한 식스(SIX) 증권거래소 산하 디지털 자산 거래소 '식스디지털거래소(SDX)'가 거래 플랫폼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토마스 모저(Thomas Moser) 국립은행 이사는 "SDX와 도매용 CBDC 실험을 완료하고, CBDC 가동을 위한 기술적인 준비를 마쳤다"면서 "도매용 CBDC의 필요성에 대한 판단과 정책적 결정만 남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스위스는 2019년부터 국제결제은행(BIS)와 도매용 CBDC 프로젝트 헬베티아(Helvetia)를 진행해왔다. 두 번째 단계까지 마무리한 상태이며, 2022년 1월 관련 보고서를 내놓을 예정이다. 프랑스 중앙은행과 국경 간 CBDC 실험을 위한 쥐라(Jura) 프로젝트도 작업하고 있다.
싱가포르, CBDC 프로젝트 '오키드' 공개
싱가포르 통화청(MAS)은 CBDC 연구 프로젝트 '오키드(Orchid)'를 시작한다. CBDC 발행에 필요한 인프라, 기술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라비 메논(Ravi Menon) MAS 총재는 연례 핀테크 페스티벌에서 프로젝트를 공개하면서 "국가가 보장하는 디지털 싱가포르가 안전하고 광범위하게 활용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총재는 CBDC를 통해 효율적이고 포괄적인 지불 생태계를 조성하고, 소규모 기업이 새로운 지불 및 관련 서비스를 손쉽게 구축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아울러, 자체 CBDC를 통해 민간 스테이블코인이나 외국 CBDC의 시장 잠식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는 호주, 말레이시아,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함께 CBDC 프로젝트 '던바(Dunbar)'를 진행 중이다. 별도로 프랑스 중앙은행과도 CBDC를 공동 연구하고 있다.
고심하는 선진국, 서두르는 개발도상국
영국, 프랑스, 싱가포르 등 경제국들은 CBDC을 발행할 때, 화폐 기능 자체보다는 사회경제적인 부분을 저울질하게 된다. 은행 계좌 이용률이 높고 효율적인 전자 결제 시스템을 갖춘 상황에서 CBDC가 뚜렷한 효과를 낼 수 있는지, 개인 정보보호 침해, 익명성 등 위험 요인을 막을 방안이 있는지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급 결제 환경이 이미 고도화돼 있는 만큼 발전된 CBDC 도입과 제도적, 정책적 문제 해결, 여론 개선 등에 CBDC 향방이 달렸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2021년 10월 15일 국정감사 자리에서 2년 내 CBDC 발행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은행은 2017년부터 연구에 착수했으며, 모의실험을 진행하는 단계에 와있다. 은행은 공론화를 위해 2021년 11월 18일 ‘2021년 한국은행 지급결제제도 컨퍼런스’도 예정하고 있다.
경제 상황이 불안정한 개발도상국들은 자체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이다. 바하마는 2020년 10월에 CBDC '샌드달러'를 발행해 사용하고 있다. 현지 법정화폐에 대한 불신으로 암호화폐로 화폐 주도권이 넘어가는 가운데, 자체 CBDC 도입을 서두른 케이스도 있다. 바로 나이지리아다. 나이지리아는 2021년 10월 25일 법정화폐를 디지털 전환하며 'e나이라(eNaira)'를 출시했다. 나이지리아는 블록체인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가 발표한 '2021년 글로벌 암호화폐 채택지수'에서 전 세계 7위에 오를 만큼 암호화폐 보급률이 높았다. 이에 정부는 암호화폐 확산을 급히 제재하고 CBDC 개발을 추진해왔다.
소매용과 도매용, 경제 발전국과 개발도상국 등 상황과 필요에 따라 CBDC에 대한 관점과 기대, 접근 방식은 다양하지만 CBDC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은행들의 은행이라고 불리는 국제결제은행(BIS)은 "화폐의 진화는 새로운 도전과 비즈니스 모델을 제공한다"면서 CBDC에 대한 각국의 연구 심화를 촉구하고 있다.
BIS는 "중앙은행들은 이미 CBDC가 금융 안정성을 강화하고 공공 정책 목표를 달성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면서, 각국 중앙은행에 공공과 민간이 모두 참여하는 광범위한 결제 시스템과 국경 간 상호운용성 확보, 사용자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혁신성 준비 등을 주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