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과 블록체인 산업이 성장하면서 관련 분쟁 사례와 유형이 증가하는 가운데, 법적 분쟁에 대한 빠른 대응이 요구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석준 서울회생법원 판사는 24일 열린 '2023년 한국정보법학회·블록체인법학회 하계공동 정기학술세미나'의 주제 발표에서 이 같이 밝혔다.
한국정보법학회가 주최하고, 한국블록체인법학회, 홍익대학교 법학연구소와 공동 주관하는 '2023년 한국정보법학회·블록체인법학회 하계공동 정기학술세미나'가 24일 오후 2시 광화문 변호사회관 조영래홀에서 진행됐다.
'블록체인과 가상자산의 최신 동향과 법적 쟁점'을 대주제로, 다양한 법적 이슈와 입법, 판례 동향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논의하는 장이 마련됐다.
이석준 판사는 제2주제 '가상자산 관련 판결 동향' 세션에서 지난해 판결 중 중요한 사례들을 공유하며 가상자산 시장과 산업에 대한 법적 체계의 윤곽이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는지 설명했다.
가상자산 산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대중 인지도를 높이는 가운데 관련 법률 분쟁이 많아지고 여러 판례들이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가상자산 관련 법원 판결의 경우, 지난해 민사 700여건, 형사 1700여건, 행정 8건 등 2400여건이 선고됐으며, 현재까지 모두 만여 건이 선고됐다고 밝혔다.
그는 "가상자산 관련 법리가 형성 중인 만큼 민형사, 행정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면서, 가상자산 채굴 관련 부가세 사건, 페이코인 사건, 위믹스 사건 등의 행정 및 민형사 부문 법리를 상세히 다뤘다.
◇ 행정법 판례, 가상자산 채굴 관련 부가세·페이코인
먼저 행정법 판례로 가상자산 채굴 관련 용역에 대해 부가가치세의 매입세액으로 공제 가능한지 여부를 다툰 소송 판결(2022. 9. 22. 선고)을 설명했다.
가상자산 채굴업 운영자가 A회사에서 채굴기를 매입하고 부가가치세를 신고하면서 재화에 대한 매입세액을 공제한 후 환급받을 세액을 신고했지만 A회사가 이를 거부하자 소를 제기했다.
법원은 가상자산이 부가가치세법이 정한 재화로 볼 수 없기 때문에 과세대상이 아니라면서 A회사의 매입세액 비공제 처분은 위법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부가가치세의 부과대상인 '재화'는 물건이나 권리를 의미하는데 가상자산은 물리적 실체가 없어 물건이 아니며 사용가치 없이 지급수단 기능만 가지므로 '권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소비재가 아니며 유통에 따른 부가가치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봤다.
이 판사는 "최근 가상자산 납세와 관련해 상속세, 증여세법, 소득세법이 개정됐는데 부가가치세법에서는 그와 같은 개정 사항이 없었다"고 밝혔다.
다만 "가상자산의 구체적인 성격과 내용에 따라 가상자산을 대가로 일정한 서비스를 제공받는 경우는 재화 또는 용역의 공급으로 보고 부가가치세를 과세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정 가상자산 지급을 통해 플랫폼 상에서 게임 등 일정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틸리티가 인정될 경우 이에 해당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또한 기초자산이 존재하는 토큰증권처럼 재화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경우, 그 기초자산의 성격이나 면세대상 여부에 따라 부가가치세의 과세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 판사는 "모든 가상자산을 일률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유형의 가상자산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며 "특정 가상자산의 목적과 내용, 이용 현황 등을 면밀히 살펴 구체적인 성격을 규명하고, 부가가치세 과세 대상 여부를 판단해야 타당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두번째로 'FIU의 가상자산매매업 변경신고불수리의 처분성'을 다룬 페이코인 관련 판결(2022. 10. 27.선고)을 다뤘다.
금융위원회 산하 금융정보분석원장(FIU)는 작년 4월 페이코인이 전자지갑사업자에서 추후 가상자산매매업자로 변경신고하는 것을 조건으로 '가상자산사업자' 신고를 수리했다.
아울러 신고 수리를 위해 작년 말까지 은행 실명계좌를 발급받도록 안내했지만 이를 완료하지 못하자 올해 1월 6일 사업자 변경신고를 불수리하고, 2월 5일까지 결제서비스 종료를 고지한 바 있다.
페이코인은 사업자변경신고 불수리 처분과 서비스 종료에 대해 취소를 요청했지만, 법원은 "불수리 처분 효력을 정지하더라도 변경신고를 수리한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며 집행 정지 신청을 각하했다.
가상자산사업자는 특금법에 따라 FIU에 신고하고, 정보보호관리체계인증과 실명확인입출금계정 자료를 제출해야 가상자산사업자로 신고 수리될 수 있다.
법원은 '법률에 신고의 수리가 필요하다고 명시된 경우 행정청이 수리해야 효력이 발생한다'는 행정기본법 근거를 두고 판결했다.
또한 사회 질서나 공공 복리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형식적 요건만 갖추거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서류 제출 시 자동 수리되는) 자기완결적 신고가 아니였다는 점, 특금법 입법 목적이 자금세탁, 테러자금조달 등에 관한 것인 만큼 사전통제가 강하게 요구되고, 실질적 요건의 심사와 수리를 요하는 신고라는 점을 고려했다.
이 판사는 "물론 특금법 상 필수 요건 서류를 제출해야 수리되는 것은 맞지만 자기완결성 신고로 볼 것인지, 수리를 요하는 신고로 볼 것인지를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자동 불수리가 아니라 재량적이고 실제적 평가의 여지를 둬야 한다"고 덧붙였다.
◇ 민사 판례, 위믹스 사건·테라 사태에 따른 거래소 출금 중단 등 다뤄
민사 판례로 투자 전문 비트코인 운용자의 투자자보호의무 인정 여부를 다툰 비트코인 선물마진 사건(2022. 5. 10. 선고)을 소개했다.
피고가 원고 대신 비트코인 투자를 수행하고 수익에 대한 수수료를 받는 포괄적인 투자위임계약 사안이었는데, 피고가 비트코인 선물마진 투자를 실행하면서 원고의 비트코인 전액이 손실됐다.
원고는 피고를 상대로 선물 투자 위험성을 사전에 고지하지 않아 금융상품에 관한 설명의무 등을 불이행하였다며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했다.
사건 쟁점은 비트코인이 금융소비자보호법에 따른 금융투자상품으로서 투자자보호의무가 인정되는지 여부, 또는 민법상 설명의무가 인정되는지였다.
법원은 비트코인이 금융투자상품으로 보기 어려워 적합성원칙, 설명의무 같은 금융소비자보호법에 따른 투자자보호의무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봤다.
다만 피고는 여러 투자자의 가상자산을 받아 고수익을 목표로 운용하는 사람으로, 필요 정보를 고지·설명해야 할 신의칙상의 의무가 인정됐다고 봤지만, 피고가 원고에게 관련 동영상을 보내는 등 적합한 고지·설명을 통해 신의칙상의 설명의무를 이행했다고 판단했다.
이 판사는 비트코인 경제성을 인정하고, 파생상품의 기초자산이 될 여지가 있어 보인다고 진단했다.
그는 "금융위 같은 경우 변동성이나 투자자 공공 손실 위험 때문에 제재하고 있지만 자본시장법 취지를 고려했을 때 제도 정비 허용하는 게 맞다고 본다"는 견해를 밝혔다.
세 번째 민사 판례는 일반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위믹스 사건, "가상자산거래소 거래지원종료결정의 위법 여부에 대한 결정(2022. 12. 7.)"에 대해 설명했다.
국내 5대 가상자산 거래소의 위믹스 코인거래지원 종료결정에 관해 효력 정지를 구한 가처분 사건 중 하나다.
위믹스 코인은 거래지원종료결정의 사유로 공지된 ▲위믹스의 중대한 유통량 위반 ▲투자자에 대한 미흡하거나 잘못된 정보 제공 ▲소명 기간 중 제출된 자료의 오류 및 신뢰 훼손 등의 사실이 없으며, 거래지원종료결정사유에 해당하는 중대한 사안이 아니라며 거래소 운용자가 일방적으로 거래지원을 종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거래소가 모여 만든 디지털자산거래소공동협의체(Digital Asset Exchange Alliance, 닥사)에서 동일한 이유를 들어 거래지원을 종료한 것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하 '공정거래법')이 금지한 '부당한 공동행위'이며, 사유를 구체적으로 통지하거나 소명 기회를 충분히 부여하지 않아 절차적으로도 위법한 만큼 거래지원 종료결정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문제가 된 건 디파이 서비스에 유동성을 공급하기 위해 제공한 위믹스코인 150만 여개와 가상자산 'KSD'를 대출받아 스테이블코인인 USDC로 변환하기 위해 'A파이낸스'에 담보로 제공한 위믹스코인 3500만여개다.
이에 대해 위믹스는 "발행량 중 채권자에 귀속된 잠긴 물량을 제외해야 한다"며 "3500만여개 담보대출 물량은 시장에 유통될 가능성이 없어 유통량에 산입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가상자산은 주식의 내재가치에 대응되는 개념을 상정하기 쉽지 않아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라 가격이 결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유통량'은 투자 판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정보라고 봤다.
아울러 "담보 제공한 위믹스 가격이 떨어지는 등 담보비율이 일정 비율 이하로 낮아지면 대출채권자는 처분할 수밖에 없고, 시장에서 유통될 수 밖에 없다"면서 "이를 유통량에 산입해야 한다"고 판단, 계획된 유통량에 대한 명백한 위반으로 판단했다.
이 판사는 이에 동의하면서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채권자가 중대한 유통량을 위반했는지 여부와 공정거래법 위반 여부"라며, 주가와 달리 가상자산의 공급량은 시가를 결정하는 주요 요소로서 투자 결정에 있어 중요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법원은 공정거래법 위반 여부에 대해서도 "닥사는 내부회의를 통해 특정 가상자산에 대하여 거래지원을 종결할지 여부를 논의할 수 있는 협의체에 불과할 뿐, 회원사에 결정을 강제할 아무런 권한이나 방법이 없어 '부당한 공동행위', 즉, 담합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법적으로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지만 가상자산 상장폐지 그 외 정책에 대해 서로 다른 결정을 하면 오히려 투자자 및 개발사 혼선이 발생할 수 있는 만큼 이를 방지하기 위해 보조를 맞춘 상호 협의로 간주했다.
아울러 "닥사 회원사는 위믹스 거래 지원에 따른 수수료 이익을 포기하는 불이익이 있을 뿐 거래지원종료를 통해 얻을 경제적 이익이 없다"며 "부당하게 거래를 거절하는 행위나 부당하게 거래상 지위를 남용하는 행위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해석했다.
이와 관련해 이석준 판사는 "거래소와 발행사 간의 관계에 있어 유통량준수의무를 어떻게 구성할지에 관해 살펴봐야 한다"면서 "계획 유통량 준수 의무 조항을 두거나, 묵시적 약정이나 신의칙에 따른 계획 유통량 준수 의무 발생 여부, 백서를 계약 내용에 포함할 것인지 등을 고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이더리움이 유사수신행위 목적물에 해당할 수 있는지를 다툰 이더월렛 사건에 대한 판결(2022. 5. 12.), 비트코인의 법적 성격과 착오 전송된 암호화폐 사용에 대한 배임죄 성립 여부를 다룬 판결(2021. 12. 16. 선고) 등 형사 판례도 공유했다.
이 판사는 가상자산 관련 판례들이 다양해지고 분쟁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추세라고 밝혔다.
행정사례는 많지 않지만 부가가치세 부과 여부 등과 같은 조세 관련 판결이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민사의 경우 과거 해킹에 대한 거래소의 책임, 가상자산 투자사기 관련 손해배상책임, 가상자산 가압류 방식 등이 주로 문제가 됐다면, 작년에는 ▲거래소 상장폐지결정에 대한 위법 여부 ▲가상자산 투자권유 과정에 있어서 투자자보호의무의 존부 ▲가상자산 보관용 전자지갑의 하자 문제 등 다양한 영역의 판결이나 결정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형사 건은 과거에 상장사기, 보이스피싱 사기 사례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죄형법정주의와 관련해 가상자산을 기존의 형법 제도에 포섭시킬 수 있을지가 가장 큰 쟁점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 판사는 "다양한 가상자산과 블록체인 체계가 개발되고 있기 때문에 ▲토큰 증권의 집단소송 문제 ▲가상자산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파생상품 쟁점 ▲가상자산 거래소의 독점 관련 쟁점 ▲STO 관련 규제 등 분쟁 유형은 훨씬 넓어질 것"이라면서 "다양한 블록체인 체계와 서비스가 생기고 있는 만큼 법적 분쟁에 대한 빠른 대응이 요구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