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컴퓨팅이 암호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존재로 여겨지는 가운데, 이 첨단 기술이 실제론 과학과 산업계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점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최근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는 양자암호 시대에 대비한 새로운 암호화 표준 3종을 발표하며 사이버 보안 체계 전환을 공식화했지만, 정작 이 기술이 처음으로 본격 투입될 분야는 의외로 암호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양자컴퓨터는 기존 암호체계를 쉽게 해독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오랜 시간 보안 전문가들의 경고를 받아왔다. 그러나 '모든 비밀이 무력화된다'는 식의 공포는 다소 과장됐다는 지적이다. 아직 양자컴퓨터는 에너지 소모와 연산 처리 속도 면에서 많은 제약을 안고 있으며, 접근 가능한 주체 또한 정부기관이나 구글(GOOGL), 마이크로소프트(MSFT) 같은 글로벌 빅테크로 국한된다. 결국 현실적으로 특정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이 막대한 자원을 투입할 이유가 줄어드는 셈이다.
이 같은 맥락은 과거 '전자현미경을 이용한 삭제 데이터 복원' 논란과도 닮아 있다. 1990년대 중반 일부 연구자가 삭제된 데이터를 전자현미경으로 복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자, 미국 국방부는 불확실한 가능성에 대비해 '7회 덮어쓰기' 같은 고강도 데이터 삭제 정책까지 도입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해당 기술은 현실성 없는 추정으로 평가됐고, 복원 가능성은 실험적으로도 입증되지 않았다. 양자암호에 대한 공포 역시 기술의 실제 가능성을 과도하게 해석한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핵심은 *양자컴퓨팅은 만능 해독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설사 이를 암호 해독에 쓴다 해도 모든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처리하긴 불가능하다. 수십억 통의 이메일, 수조 건의 메시지 중 유용한 정보를 담은 일부를 집어내야 하는데, 이는 해당 정보에 대한 명확한 사전 인지가 없는 이상 불가능에 가깝다. 바로 이 '선별의 어려움'이 양자컴퓨팅의 실질 활용처를 암호 해독보다 더 생산적인 분야로 이끌고 있다.
실제로 양자컴퓨팅의 가장 유력한 응용 분야는 신약 개발, 첨단소재 합성, 우주 항법 개선 등 고난이도 이론 계산과 시뮬레이션 영역이다. 이미 제약업계와 항공우주 산업에서는 복잡한 분자동역학이나 연료 사용 최적화, 내구성 높은 신소재 발굴 등을 위해 양자 알고리즘 도입을 본격화하고 있다. 이는 곧 경제적 파급력이 압도적인 산업 혁신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물론 특정 조건만 맞는다면 암호 해독도 현실화될 수 있다. 적대적인 국가가 특정 고가치 정보에 접근할 필요가 있을 때, 양자컴퓨터를 투자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전체 패러다임을 바꿀 정도의 영향력을 갖기보다는, 전략적 용도에 국한될 가능성이 더 크다.
요컨대, 양자컴퓨팅을 다가올 '암호 재앙'의 기점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은 과도하다. 암호체계 전면 교체에 수조 원대의 비용을 쏟아붓기 전에, 이 기술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사용될지를 냉정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양자컴퓨팅은 단기적 위협보다 장기적 기회로 접근해야 하는 대상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