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간 인수합병(M&A) 시장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자금력을 앞세운 유니콘 스타트업들이 과감한 베팅에 나서며, 수억 달러 규모의 인수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특히 벤처 투자업계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단기 트렌드를 넘어 구조적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크런치베이스(Crunchbase)에 따르면 최근 1년간 미국 내 벤처 또는 시드 단계 스타트업 423개가 다른 VC 지원 스타트업에 인수됐다. 이 가운데 다수는 가격 미공개지만, 가격이 공개된 몇몇 거래의 규모를 보면 총액이 약 6조 6,000억 원($6.3B)을 넘는다. 이는 이전까지 '스타트업의 스타트업 인수는 소규모일 것'이라는 통념을 뒤집는 수치다.
가장 주목받는 사례는 핀테크 기업 스트라이프(Stripe)의 인수 건이다. 스트라이프는 지난해 10월, 또 다른 핀테크 스타트업 브리지(Bridge)를 1조 5,800억 원(약 $1.1B)에 인수하며 대형 거래의 포문을 열었다. 이어 올해 초에는 이커머스 기술기업 록트(Rokt)가 고객 데이터 플랫폼 엠파티클(mParticle)을 4,300억 원(약 $300M)에 인수했으며, 인피니트 리얼리티(Infinite Reality)는 에이전틱 AI 스타트업 터치캐스트(Touchcast)를 현금과 주식 합쳐 7,200억 원(약 $500M)에 사들였다.
이들의 적극적인 공격은 막대한 자금력에서 비롯된다. 스트라이프는 지금까지 누적 13조 5,000억 원(약 $9.4B)을 유치했으며, 인피니트 리얼리티도 4조 8,000억 원(약 $3.4B)을 조달한 바 있다. 인공지능 열풍의 중심에 있는 오픈AI(OpenAI) 또한 최근 2년 동안 세 건의 인수를 단행하는 등 인수시장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M&A 건수 기준으로 보면 데이터브릭스(Databricks)와 오토매틱(Automattic), 그럽마켓(GrubMarket), 그리고 게임 개발사 스코플리(Scopely) 등이 가장 활발한 편이다. 데이터브릭스는 최근 5년간 인수한 11개 기업 가운데, 모자이크ML(MosaicML)을 1조 8,700억 원(약 $1.3B)에 사들인 것이 최대 규모였다. 그럽마켓은 벌써 54건의 인수를 기록했으며, 대부분 식자재 공급망 생태계 내 유통업체나 물류 소프트웨어 기업들로 구성돼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유니콘 스타트업들이 단순히 스케일업이 아닌, 전략적 성장을 위한 툴로 M&A를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기술력 확보 또는 시장 장악을 위해 스타트업 간 협업보다는 '사들임'을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흐름이 장기화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최근 미국 증시 조정과 대형 테크주의 주가 하락으로 공개시장 상장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자본력을 갖춘 비상장 유니콘들이 인수 시장의 핵심주체로 부상하고 있는 양상이다. 다만 대부분의 인수가 가격 비공개로 이뤄지는 만큼, 스타트업 생태계 전반의 자산가치 변화를 정량적으로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유니콘 스타트업들의 공격적 인수는 시장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버티며 성장하려는 또 다른 생존 전략인 셈이다. 스타트업 투자자들 역시 이 같은 M&A가 자산 회수(exit)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 흐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