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자아를 주제로 한 게임 ‘프로시(Proxi)’가 위기를 맞고 있다. ‘심즈(The Sims)’의 창시자 윌 라이트(Will Wright)가 발명한 이 독창적 프로젝트는 인간의 기억을 현실감 있는 3D 세계로 재현하는 새로운 장르의 게임이지만, 유례없는 아이디어 때문인지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갈륨 스튜디오(Gallium Studios)의 CEO 로렌 엘리엇(Lauren Elliott)은 현재 자금이 바닥나기 직전이라며 마지막 기대를 걸고 게임의 진실된 상황을 외부에 알리고 있다.
프로시는 유저가 자신의 기억을 텍스트로 입력하면, 그 내용을 인공지능을 활용해 시각적 장면으로 변환해주는 과정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생성형 AI와 신경 과학 기반의 기술을 결합해 인간의 내면적 세계를 3차원 공간 안에 시각화하는 실험적인 접근이 이뤄진다. 라이트는 “기억은 스노우볼처럼 연결돼 있고, 프로시는 이 기억들을 구조화된 이야기로 변환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게임의 독특함은 개발 초기 ‘심즈’가 겪었던 반응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 1990년대 중반, 라이트는 자서전적 요소가 반영된 ‘심즈’를 기획하며 내부 저항에 부딪혔다. 사람 중심의 게임 콘셉트는 생소했고, 시장성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다. 결국 이 게임은 전 세계 2억 장 이상 팔려 50억 달러(약 7조 2,000억 원)의 수익을 올리며 대성공을 거뒀지만, 시장은 당시 과감한 상상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프로시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갈륨 스튜디오는 2022년 VC인 그리핀 게이밍 파트너스(Griffin Gaming Partners)로부터 600만 달러(약 86억 4,000만 원)를 투자받아 프로토타입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이후 마케팅과 상용 버전 출시 자금 확보에 실패했다. 윌 라이트는 “우리 팀은 열정적이고 창의적이지만, 대형 퍼블리셔들은 최소 2,000만 장 이상 팔릴 수 있는 게임만 원한다”며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했다.
AI가 게임업계에 본격 진출하며 콘텐츠 생성, 마케팅, 개발 자동화는 가속화하고 있다. 엘리엇은 현재의 산업 구조가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EA의 마케팅 예산은 연간 10억 달러(약 14조 4,000억 원) 수준인데, 그 돈이면 최소 10개 스타트업을 운영할 수 있다”며 자본의 불균형에 대한 불만을 내비쳤다.
프로시는 단순한 게임을 넘어 자기인식과 정신 건강에 기여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도구로도 해석된다. 유저들은 자신의 기억을 3D로 정리하며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되짚고, 이를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감정적 연결과 성찰을 경험한다. 라이트는 “기억을 통해 인생을 구조화해보면, 나 자신의 모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갈륨 스튜디오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정신적 공감이 아닌 실질적인 투자다. 새로운 자금을 유치하지 못하면 프로시는 출시되지 못할 수도 있다. 라이트의 명성과 경험이 투자를 보장하지 못하는 시대, 게임업계는 또다시 ‘혁신’보다 ‘안전’을 택하고 있다.
프로시는 윌 라이트가 30년 넘게 품어온 이상향이다. 비록 지금은 투자자 설득조차 쉽지 않은 현실이지만, 이 게임이 세상에 출현할 기회를 잃는다면, 이는 반복되는 실패가 아닌 산업 전반이 놓친 기회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