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어느 나라든 디지털자산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려는 노력에 소극적이다. 그 이유는 디지털자산이 투자자보호의 필요성과 관련산업 진흥의 필요성을 모두 요구하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의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디지털자산의 증권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고소를 앞세우는 등 ‘집행에 의한 규제’(regulation by enforcement)를 선택했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디지털자산에 대한 증권 여부 판단의 기준이 어떻게 급변하고 있는지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우이 테스트: 투자계약 판단의 기준
1946년 미국 대법원의 판결 가운데 하우이(Howey) 테스트가 포함되어 있다. '타인의 노력'(4)에 의해 '이익의 기대'(3)가 예상되는 '공동사업'(2)에 투입된 '돈'(1)이 있는 경우 해당 계약을 투자계약(investment contract)으로 본다는 게 그 유명한 하우이 테스트이다. 원칙적으로 이 기준에 따르면 대부분의 디지털자산이 투자계약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게 중론이나 SEC는 오히려 거의 모두가 증권에 해당한다고 여기고 있다.
SEC 전 위원장이었던 제이 클레이튼(Jay Clayton)이 비트코인은 증권이 아니라고 했다. SEC의 전 기업금융국 국장이었던 윌리엄 힌먼(William Hinman)은 이더리움도 증권의 성질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렇지만 SEC의 현 위원장인 게리 겐슬러(Gary Gensler)는 증권이 아닌 것은 비트코인뿐이라고 했다. 한편 SEC는 2020년 12월 리플의 공동창업자인 브래드 갈링하우스(Brad Garlinghouse)와 크리스 라슨(Chris Larsen)을 증권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디지털자산 평가에서 ‘공동의 사업’과 ‘돈’은 피할 수 없다. 문제는 ‘타인의 노력’과 ‘이익의 기대’에 있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증권이 아닌 상품(commodity)으로 보는 것은 하우이 테스트의 ‘타인의 노력’에 의한 ‘이익의 기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에 근거한다. 충분히 탈중앙화된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의 경우 그 가격을 올리거나 내려 이익을 실현하려는 명확한 주체가 없어 ‘타인의 노력’이 관측되지 않는다. 따라서 충분히 탈중앙화되어 작동하는 디지털자산을 SEC가 투자계약으로 볼 가능성이 낮다.
텔레그램 사례: 하우이 테스트의 쟁점
2018년 텔레그램은 그램(Gram)이라는 암호화폐를 발행할 플랫폼인 TON(Telegram Open Network)을 만들기 위해 175명의 초기 구매자들로부터 SAFT(Simple Agreement for Future Tokens) 공개를 통해 17억 달러를 모금했다. 텔레그램이 투자자들에게 그램을 배포하기 직전인 2019년 10월 11일 SEC는 뉴욕 남부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고 토큰 배포 중지 명령을 얻어냈다.
이 재판의 쟁점 가운데 하나가 SAFT 판매와 그램의 출시를 묶어서 하나의 투자계약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SAFT는 투자계약으로 인정하지만 그램 출시는 투자계약이 아니므로 분리해서 다룰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SEC는 SAFT를 통한 그램 판매와 예정된 그램 분배가 (상품의) 소비 목적이 아니라 투자 목적으로 "실제로 하나의 거래"라고 주장했다. 텔레그램은 SAFT 판매와 그램 토큰의 배포를 별도로 보아야 하는데 전자는 유가증권 제공으로 간주되고 후자는 상품 판매로 간주된다고 주장했다.
주목할 것은 전문가 의견서(amicus curiae brief)에서 하우이 소송의 대상이 된 투자계약은 증권이지만 기초자산 그 자체인 오렌지는 증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비영리기관인 디지털 상공회의소(Digital Chamber of Commerce)와 블록체인협회(Blockchain Association)가 의견서를 제출했는데 둘 다 디지털자산이 투자계약의 대상이라고 해서 해당 디지털자산 그 자체가 반드시 증권이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했다. 또한 블록체인협회는 디지털자산의 배포 및 홍보 행위가 충분히 탈중앙화되어 있다면 해당 자산을 홍보하는 제3자가 없으므로 증권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윌리엄 힌만의 견해를 인용했다.
아무튼 2020년 3월 24일 법원은 가처분을 인용하고 예정된 그램 발행을 중단시켰다. 텔레그램은 즉각 항소했다가 항소를 철회하고 투자자들에게 12억 달러를 환불하며 SEC에 1850만 달러의 벌금을 내는 데 합의했다.
이 판결은 가처분 소송의 판결이라는 점, 그리고 케빈 카스텔(Kevin Castel) 판사의 단독 판결이라는 점 때문에 충분히 심층적인 법률적 판단에 도달했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텔레그램이 항소를 철회함으로서 상급법원의 판단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증권성 판단에 필요한 중요한 판례를 남긴 것은 의미가 있다. SEC가 제출한 전문가 의견에는 그램 할인판매 가격의 문제점, 백서에서 밝힌 그램 용도에 미치지 못하는 TON의 기술적 완성도 등이 언급되고 있다.
자금 모집을 통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관리하는 그룹의 노력으로부터 이익을 기대했다는 점에서 그램의 초기 투자자들의 구매계약을 투자계약으로 본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렇지만 네트워크 개발이 완료되어 본격적으로 운영되는 어느 시점에서 그램의 구매 및 사용이 본질적으로 투자가 아닌 소비로 평가될 수 있다. 이때 SAFT는 투자계약이지만 디지털자산은 투자계약의 대상이므로 증권이 아니라 상품이라는 입장이다. 또한, 네트워크가 충분히 분산되어 탈중앙화되면 하우이 테스트의 네 번째 항목에 해당하지 않아 증권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견이 판결에는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잘 반영한 게 SEC 커미셔너 헤스터 피어스(Hester Pierce)의 ‘토큰 세이프 하버 제안’(Token Safe Harbor Proposal)이다. 디지털자산 프로젝트가 시작한 후 3년의 경과를 지켜본 다음 충분히 탈중앙화되었다고 판단되면 증권으로의 등록을 면제하자는 게 이 제안의 핵심이다.
루미스-질리브랜드 법안: 투자계약의 새로운 정의
2022년 미국 의회에 제출된 루미스-질리브랜드(Lummis-Gillibrand) 법안 가운데 증권에 관한 새로운 정의가 추가되었다. 하우이 테스트에 따라 증권형 디지털자산으로 판정되더라도 그 자산이 보조자산(ancillary asset)의 범주에 들어가면 루미스-질리브랜드 법안에 따라 증권으로 보지 않겠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부채증권이나 지분증권의 지분에 해당하지 아니하거나 수익 청구권, 청산 우선권 등 재무적 지분에 대한 권리를 주는 게 아니어서 증권의 성질을 지니지 아니하는 보조자산을 일반상품으로 추정하자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매년 2회에 걸쳐 보조자산 관련 공시자료가 증권래위원회(SEC)에 제출되어야 한다.
분산자율조직(DAO) 형태의 보조자산은 '타인의 노력'에 의하지 아니하고 '프로토콜'에 의존하기 때문에 증권으로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 법안의 제안자인 루미스가 DAO를 유한책임회사(LLC)로 인정한 와이오밍 주 의원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DAO는 초기에 소수의 개발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참여자가 늘어나 점차 권한이 분산되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개발자의 노력에 의존하는 증권으로 시작되어 증권이 아닌 보조자산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게 보조자산의 운명이다.
그런데 아래 열거된 권리를 보유자에게 제공하는 자산은 보조자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 선거권(Voting rights);
- 이자, 배당금 또는 이익에 대한 권리(Rights to interest, dividend payments, or profits);
- 부채 또는 지분(A debt or equity interest);
- 청산 권리(Liquidation rights).
- 기타 금융이익(any other financial interest)
디지털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홀더 누구에게나 투표권을 주면 그게 증권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코인을 사면 무조건 투표권을 주지 않고 일정 양을 예치할 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은 증권으로 간주되지 않도록 머리를 쓴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만일 루미스-질리브랜드 법안이 통과된다면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을 제외한 많은 디지털자산들도 보조자산으로 편입될 수 있다. 보조자산으로 인정되면 많은 코인들이 증권이 아닌 상품으로 인정된다.
SEC의 내부자 거래 고소
2021년 8월부터 2022년 5월까지 코인베이스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로 이샨 와히(Ishan Wahi)가 근무했다. 그는 코인베이스에 상장될 예정인 코인 25종의 정보를 동생과 친구에게 미리 알려줘 그들이 상장 전에 코인을 사서 상장 후 팔아 큰 수익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에 대해 두 건의 소송이 진행될 예정이다. 미국 뉴욕 남부연방검찰이 이들 3명을 배임에 해당하는 통신사기(wire fraud) 혐의로 기소했다. 또한 SEC는 이들을 워싱턴 서부지방법원에 증권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SEC는 기소장에서 그 가운데 최소한 9종의 코인을 증권으로 분류했다. 그 9가지 코인은 AMP, RLY, DDX, XYO, RGT, LCX, POWR, DFX, KROM이었다. SEC 고소장에 따르면 그 3인의 혐의는 사전 획득한 비공개 정보를 이용한 내부자 거래이다.
내부자 거래로 고소를 하려면 해당 코인이 증권이라야 한다. 이 사건은 미국에서 디지털자산과 관련해 내부자 거래 혐의가 적용된 첫 사례이다. 이는 미국의 규제당국이 마땅한 기준을 마련하고 있지 못해 좌충우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고소를 두고 전문가들은 '집행에 의한 규제'에 의존하고 있고 비난한다. 해당 코인이 증권이 아닐 수 있고 SEC가 증권성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만들지 않으면서 먼저 고소를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SEC 고소장은 그 9종의 암호자산들을 "암호증권자산(crypto securities assets)"으로 명명했다. 이들을 증권이라고 스스로 정의하고 내부자 거래 혐의로 고소한 셈이다. 그렇지만 해당 코인의 발행자들은 자신들이 내부자 거래를 한 게 아니고 고소된 3명이 코인베이스를 끼고 벌인 일인데 엉뚱하게도 내부자 거래를 근거로 투자계약으로 판정한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마무리하며
미국에서는 디지털자산이 상품이면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에서 관장하고 증권이면 SEC가 맡게 된다. CFTC의 커미셔너인 캐롤라인 팸(Caroline Pham)은 SEC의 태도에 비판적인데 9개의 디지털자산을 증권으로 판정한 것을 충격적인 ‘집행에 의한 규제’로 봤다. SEC가 일회성 고소 등을 통해 규제의 근거에 필요한 통찰력을 얻고 있다고 업계가 비난한다. 동일한 사건에 대해 미국 법무부도 이 사례를 검토한 후 증권사기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다. 애꿎은 업체들이 SEC에 의해 피소되어 법정에서 힘들게 다투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미국에서 디지털자산의 규정이 쉽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앞으로 디지털자산의 증권 여부 판정의 기준이 어떻게 정해질 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