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정규제기본법이란
정부는 국민과 기업 등 정책수요자에게 규제의 내용을 알기 쉽게 제공하기 위해 1998년 행정규제기본법 시행과 함께 규제등록제도를 도입하였다.
행정규제기본법 제4조에 따르면 ‘규제는 법률에 근거하여야 하며’ ‘행정기관은 법률에 근거하지 아니한 규제로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할 수 없다’고 규제 법정주의를 명확히 천명했다.
또한 동법 제5조의2에서 ‘신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서비스나 제품과 관련된 규제를 조례·규칙에 규정할 때에는’ ‘규제로 인하여 제한되는 권리나 부과되는 의무는 한정적으로 열거하고 그 밖의 사항은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방식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도록 했다.
◇ 2017년 정부 대책의 불법성
비트코인 가격이 급등하자 정부는 2017년 12월 1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홍남기 당시 국무조정실장 주재로 '가상통화 관계부처 차관회의'를 열어 긴급하게 대책을 발표했다.
그 대책에는 ‘금융기관의 가상통화 보유·매입·담보취득·지분투자를 전면적으로 금지한다’는 규제가 포함되었다. 문제는 이 규제가 어느 법령에 근거하고 있는지 당국의 설명이 없었다.
재미 있는 사실은 그간 금융기관들이 한 번도 이 대책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변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거다. 한국에서는 ‘을’의 처지인 금융기관이 ‘갑’인 금융당국에 법적 근거를 대라고 따질 수 없다. 그러니 금융기관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말이 있다. 정권이 바뀌어 디지털자산 산업을 진흥할 거라고 믿었던 국민 입장에서 볼 때 지금이 딱 그렇다. 정권이 바뀌었는데 전혀 정권이 바뀐 것 같지 않다.
2017년 12월 13일에 있었던 무모한 규제는 문재인 정권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윤석열 정권도 그 규제에 동의하는지 입장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공정과 상식을 표방하는 윤석열 정권의 관점에서 그 규제가 행정규제기본법의 규제 법정주의 취지에 부합하는 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면 될 일이다.
부합하지 않으면 그 규제를 철회해야 한다. 부합한다면 법적 근거를 제시하면 된다. 그래야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규제의 불확실성이 제거된다.
◇곤혹스런 기업의 입장
2021년 7월 신한은행이 클레이튼 거버넌스 카운슬 멤버로 참여한다고 공표했다. 멤버로 참여하여 노드를 운영할 경우 블록체인의 블록 검증에 따라 클레이튼 플랫폼 디지털자산인 클레이를 보상으로 받게 된다.
그런데 그때의 가상자산 보유 금지 조치로 인해 신한은행이 아무런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클레이튼 재단이 신한은행을 멤버에서 퇴출시켰다.
2022년 3월 신한금융지주가 원화마켓 거래소 코빗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신한금융지주는 바로 투자를 중단했다. 표면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았으니 그 속내를 알 수 없으나 그때 지분투자를 금지한 대책회의 결과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런데 신기한 건 2021년 2월 한화투자증권이 업비트의 운영사인 두나무의 지분 6.4%를 583억원에 인수했다는 점이다. 이건 되고 저건 안 되는 이유를 알 길이 없다.
◇ 공무원 가상화폐 보유·거래 사실상 금지
2018년 2월, 직무상 가상자산과 관련이 있는 공무원이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를 보유하거나 거래할 수 없다고 국민권익위원회가 선을 그었다. 직무와 관련이 있다면 이해충돌 예방 차원에서 수긍할 수 있는 조치라고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국민권익위가 직무와 관련이 없는 일반 공무원의 가상자산 거래의 자제를 요구했다. 이 요구는 공무원들에게 자제로 들리지 않았고 금지로 받아들여졌다.
더 나아가 2021년 5월에는 국민권익위가 가상자산 업무 관련 기관별 운영 실태를 점검한다고 통보했다. 경찰도 마찬가지로 사실상 금지 조치를 취했다.
주식과 관련해서는 공직자윤리법에서 재산 공개대상자인 고위공직자의 보유 주식이 3천만 원을 초과하는 경우 이를 매각 또는 신탁하도록 했다. 또한 시행령에 따르면 4급(경찰 또는 세무 등 특정분야 7급) 이상 공무원은 직무 관련 주식을 취득할 수 없다.
그런데 포괄적으로 모든 공무원들에게 디지털자산을 보유하거나 거래할 수 없게 한 것은 과도하다. 게다가 공직자윤리법 같은 법률에 의한 금지가 아니다. 이런 걸 초법적인 규제라고 한다.
◇잘못된 규제 철폐 요구할 수 있어
행정규제기본법 제17조에는 ‘누구든지 위원회에 고시(告示) 등 기존규제의 폐지 또는 개선을 요청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한국핀테크학회는 그때의 금지 조치가 법률에 근거하지 않았으며, 신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서비스나 제품의 제공을 우선 허용하고 사후 규제한다는 원칙에 위배되어 그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고 규제개혁위원회에 의견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그때의 대책은 폐지 또는 개선을 요구할 대상이 아니라고 회신이 오면 최악이겠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한다.
◇ 적법한 규제는 환영
기업이나 학회나 협회들이 무조건 규제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합리적인 규제는 환영한다. 마약, 폭력, 차별, 자금세탁 등 사회 통념에 배치되는 것에 대한 규제는 환영한다. 투자자보호를 위한 규제도 마찬가지다. 다만, 규제는 법에 따라야 한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적법한 규제를 만드는 데 앞장서 주기를 바란다. 특히 여당은 앞에서 지적한 2017년의 금융기관 옭아매기 규제나 사실상 모든 공무원의 디지털자산 투자를 금지한 2018년의 규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여당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다. 그냥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법률에 의한 규제를 해 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