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어감과 다르게, 사업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규제다. 법과 제도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은 산업은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새롭게 등장한 산업일수록 합법과 불법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코로나19 시기 암호화폐 산업은 급격히 성장했지만, 투자자 보호와 산업 진흥에 필요한 규제는 전무(全無)하다. 이런 상황에서 새 정부는 친(親) 암호화폐 기조를 선언했다. 암호화폐 산업에는 어떤 규제가 필요할까. 정부는 무엇을 막고 무엇을 허용해야 할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에게 규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제20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새 정부의 정책 방향에서 어떤 부분을 조언하셨습니까?
저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지역균형발전특별위원회(특별위) 간사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가 저출산과 고령화인데, 그 원인을 따져보면 지방에 일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방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매년 10만 명씩 수도권으로 들어오지만 비싼 집값과 구직난 때문에 결혼과 출산을 꺼리게 됩니다.
실제로 전국 합계 출산율이 0.81명이지만 서울은 0.63명에 불과합니다. 이런 추세라면 2050년 한국 인구는 4천만 명 이하로 감소합니다. 생산 가능 인구가 줄어들면 성장률도 감소하면서 대한민국 전체의 위기로 이어집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위 활동 간 광역시도별 정책과제를 만드는 것을 도왔습니다.
또한 정부의 블록체인과 디지털자산 정책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을 냈습니다. 지난 5년간 암호화폐 산업은 말 그대로 암흑기였습니다. 다행히 새 정부 들어서 디지털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이를 위해 학회에서 두 달여간 연구를 통해 정부에 디지털산업 육성 정책을 건의했는데, 저희가 건의했던 상당 부분이 국정과제에 반영됐습니다. 디지털자산특별법 제정이나 암호화폐공개(ICO)·거래소공개(IEO) 허용이 대표적입니다.
이는 지난 정권과 달리 상당히 전향적인 행보입니다. 저는 이제 디지털자산이 암흑기를 거쳐 중흥기가 온다고 보고, 또 반드시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의 확산을 시작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국의 금리인상 등 국제 정세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현재 국제 정세에 대해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말 그대로 대전환의 시기입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우리는 개방과 협력을 기치로 하는 세계화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세계무역기구(WTO)의 전신인 가트(GATT),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국제기구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죠. 그런데 지금은 반세계화(Anti-globalization)로 가고 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간 대립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일종의 ‘냉전 2.0’ 시대가 오고 있는 셈입니다.
특히 지금껏 세계를 주도해왔던 미국의 리더십이 도전받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미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부채가 130%를 넘고, 조만간 200%를 돌파한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미국이 참전하지 못하는 건 전쟁을 진행할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등장하며 일종의 강대국 세력 교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반세계화의 끝에는 언제나 전쟁이 있었습니다. 세계사를 보면 새롭게 부상한 신흥 강국과 기존 강대국 간 전쟁이 발생하는데, 이를 '투기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이라 합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전쟁을 벌인 것이 대표적입니다. 민주국가 미국과 전체주의 성격의 중국도 그때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도 반세계화의 기조 속에서 냉전2.0, 강대국의 세력 교체기가 맞물려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글로벌 공급망이 무너지고 있다는 겁니다. 한국만 하더라도 중국과 러시아에 상당히 많은 공장이 진출해있는데, 현지에서 생산한 물건을 국내로 가져오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공급망이 붕괴해 원자재 가격이 올라가면 물가도 올라가고, 이것이 또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시작됩니다.
가장 위험한 시기는 내년입니다. 임금과 물가를 제대로 잡지 못하면 내년에 큰 사회적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이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새 정부는 2024년 총선도 위태로울 겁니다.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미래 먹거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4차 산업혁명과 미래 금융 판도에서 한국이 극복해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요?
하드웨어 측면에서 한국은 이미 선진국입니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으로 반도체와 초고속 통신망, 모바일을 꼽는데 우리나라는 각 분야에서 이미 일류잖아요. 다만 우리나라는 규제가 너무 많습니다.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모피아(재정부와 마피아의 합성어)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고 금융산업을 질식시키고 있습니다.
규제 타파야말로 집권 6개월 이내, 힘이 가장 셀 때 단행해야 할 조치입니다. 다만 새 정부는 검찰과 모피아 출신 규제 전문가들을 다시 등용했습니다. 규제를 해오던 사람을 자리에 앉힌 만큼 규제 혁신은 쉽지 않을 겁니다.
두 번째로는 인력 양성이 필요합니다. 인공지능을 예로 들어보면, 전문가들은 인공지능에 대해 미적분을 코딩화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지금 입학하는 학생들의 대부분은 미적분을 모릅니다. 우리나라가 40년 넘게 평준화 교육을 해오면서 기초학력이 떨어지고 첨단산업에 필요한 인재 양성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규제 혁신과 인재 양성, 이 두 가지가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부응하는 금융 산업 육성을 주장하시면서 암호화폐, 블록체인을 지목하셨습니다.암호화폐와 블록체인의 역할과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통 금융에서 한국이 선진국을 따라잡기는 이미 늦었습니다. 오히려 한국의 금융회사들은 너무 많은 규제에 해외로 떠나고 있는 상황이죠. 다만 디지털 금융은 다릅니다. 디지털 금융의 기반인 모바일이나 초고속 통신망 부분은 우리가 앞서 있습니다. 규제만 해소된다면 디지털 금융의 패권을 잡고, 디지털 금융의 중심지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국민소득이 늘어나려면 임금이 올라갈수록 발전하는 산업 구조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디지털 금융이 필요합니다. 디지털 금융이 발전하면 우수 인재를 공급하기 위해 세계적인 금융대학원이 들어오고, 세계적인 컨퍼런스나 회의가 개최되면서 마이스(MICE) 산업과 관광 산업이 발전합니다. 이 4가지 산업의 공통점은 임금이 올라갈수록 발전한다는 점입니다. 인건비가 올라갈수록 경쟁력이 하락하는 제조업으로는 국민소득을 높일 수 없습니다. 금융·교육·마이스·관광 산업의 육성을 위해선 디지털 금융 산업이 꼭 필요합니다.
새 정부는 우호적인 암호화폐 정책을 약속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들이 마련돼야 할까요?
그동안 산업에는 최소한의 규제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필요한 규제를 도입하면서 산업 진흥과 규제의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먼저 디지털자산기본법과 같은 업권법이 선행적으로 만들어져야 하겠죠. 이미 많이 늦었지만, 국내 ICO 허용도 필요합니다. 카카오의 클레이튼도 싱가포르에서 발행하지 않았습니까. 해외에서 코인을 발행하면 그만큼 국부와 인력이 유출됩니다. 새 정부가 공약한 ICO와 IEO 허용은 산업 진흥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또한 금융은 기본적으로 간접 규제가 원칙입니다. 흔히 자율규제기관(Self Regulation Organization, SRO)이라 하죠. 은행연합회나 금융투자협회처럼, 암호화폐 산업도 디지털자산협회 같은 자율규제 기구가 필요합니다. 협회가 자율적으로 산업을 규제하고, 감독 당국은 SRO를 감독하는 구조입니다.
투자자들이 믿고 투자할 수 있는 상장 가이드라인도 필요하고, 더 나아가 암호화폐의 발행과 거래, 보관을 분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증권의 경우 발행은 증권회사가, 거래는 증권거래소가 맡고 실물은 예탁결제원에서 보관하지 않습니까. 암호화폐 산업도 이처럼 발행, 거래, 보관을 분리해 서로 간의 충돌을 방지해야 합니다.
세계 경제 패권국인 미국도 암호화폐 규제만큼은 통일된 규제 정책을 수립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규제를 마련하는 데 있어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미국의 상황은 우리나라와 많이 다릅니다. 미국은 기축통화국이잖아요. 암호화폐, 특히 스테이블코인이 많이 유통될수록 달러의 위상은 추락합니다. 미국이 만성 적자를 내면서도 부도가 나지 않는 이유는 기축통화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10달러의 비용으로 100달러를 찍어낼 수 있습니다. 기축통화국이 갖는 시뇨리지(seigniorage, 화폐 발행에서 얻는 수익) 혜택입니다.
기축통화 혜택은 미국 국민의 후생(Welfare)과도 직결되는 부분입니다. 과거 미국 의회가 페이스북의 암호화폐 ‘리브라’ 발행을 막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전 세계 30억 명이 사용하는 화폐가 나오면 달러의 위상이 추락하고, 그만큼 미국의 시뇨리지가 감소하잖아요. 국익과 관련된 부분이기에 의회에서 압력을 가했고 페이스북은 사업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암호화폐 산업 규제에서 미국의 최우선 고려사항은 국익입니다. 한국과는 고민 자체가 다른거죠. 물론 국제공조가 필요한 암호화폐 특성상 미국의 규제 동향을 면밀히 관찰해야 합니다. 그러나 '미국이 하니까 우리도 한다' 혹은 '미국이 안하니 우리도 안한다'는 생각은 근시안적이고, 국제금융 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태도입니다.
주요국 중앙은행의 디지털화폐(CBDC) 연구·개발 움직임이 물밑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미 디지털 위안화의 유통 단계에 이미 와있는데, 앞으로 주요국의 CBDC 개발과 상용화가 글로벌 금융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CBDC가 중요한 이유는 국제 기축통화 지위를 판가름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전문가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최소한 동아시아만에서라도 위안화가 기축통화가 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중국 국민의 후생수준을 한국만큼 높이고 싶어도, 제조업 기반의 생산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의 후생을 높이려면 똑같은 경제 규모를 가지고도 더 많은 재화를 소비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선 기축통화국의 지위가 필요합니다.
전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는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권에서, 유로화는 유로존에서 통용되고 있습니다. 중국이 노리는 것은 아시아권에서 위안화를 통용시키는 것입니다. 그동안 중국은 '위안화의 국제화'를 통해 기축통화를 넘봤지만 실패했습니다. 그 이후에 추진하고 있는 것이 디지털 위안화 발행입니다.
미국은 딜레마에 빠진 상황입니다. 디지털화폐를 인정하자니 달러의 위상이 흔들리고, 가만히 있으면 중국의 CBDC와 같은 기술 발전이 무섭게 쫓아오고 있습니다.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CBDC 발행을 준비하고 있고, 일부 국가는 비트코인을 자국의 통화로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미국도 디지털 대세를 꺾지 못하고 타협안을 내놓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이 국제 금융 제도 일대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겁니다.
한국은 이미 신용카드, 간편결제 등의 인프라가 잘 발달돼 있어 CBDC의 효용이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CBDC를 개발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CBDC는 통화주권과 관련돼 있습니다. 코로나가 끝나가면서 관광 산업도 다시 활기를 찾고 있는데, 만약 중국 사람들이 명동에서 중국 디지털 위안화로 물건을 구입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 입장에선 5위안의 비용만으로 100위안 가치의 물건을 사는 셈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부가 해외에 그대로 유출됩니다. 한국 또한 디지털 원화를 통해 외국의 시뇨리지 혜택을 상쇄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한거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물 경제가 이미 디지털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물이 디지털화되는데 통화, 금융이 아날로그에 머문다면 발전을 저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화폐는 실물 경제와 함께 디지털화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체불가토큰(NFT), 플레이투언(P2E) 등 암호화폐 시장의 트렌드가 빠르게 변하고 있는 반면, 이에 대한 규제는 매우 미비한 수준입니다. 어떻게 하면 시장 발전과 규제가 발맞춰 갈 수 있을까요?
규제는 항상 시장과 기술의 발전을 뒤늦게 따라옵니다. 민간 부문의 기술 발전을 정부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산업을 그대로 놔두면 투자자 피해를 비롯한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테라·루나의 경우에도 알고리즘 스테이블코인과 디파이 부분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산업에서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필요한 규제를 도입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산업이 자리를 잡아가게 되겠죠.
이미 암호화폐 시장은 단순 거래나 투자를 벗어나 NFT, 메타버스, P2E 등 다양한 산업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실물 자산을 디지털자산과 연동하는 조각투자도 늘어나고 있고요. 앞으로는 디지털자산 시대가 활짝 개화할 겁니다. 산업 발전을 법이 따라가지 못하면 산업 자체가 죽습니다. 결국 정부는 디지털자산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또 인정하게 될 겁니다.
본 인터뷰는 <BBR: Blockchain Business Review> 8월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