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쓴 칼럼 한 편이 많은 관심과 응원을 받게 되었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블록체인 인프라 기업 DSRV가 금융위원회로부터 가상자산사업자 라이선스를 받았다는 이유로,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벤처기업 인증 취소 통보를 받게 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사실 처음엔 홧김에 쓴 글이었다. 그런데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이 사태를 차근차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블록체인 업계는 물론 스타트업 업계 전체를 위해서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 몇 편에 걸쳐 이 과정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우선, 현재 중소벤처기업부가 ‘벤처기업 제외 업종’으로 지정한 업종은 총 6개다.
• 일반 유흥 주점업
• 무도 유흥 주점업
• 기타 주점업
• 기타 사행시설 관리 및 운영업
• 무도장 운영업
• 블록체인 기반 암호화자산 매매 및 중개업
이 목록만큼 블록체인 기업이 한국에서 받는 취급을 명확히 보여주는 자료가 또 있을까.
흥미로운 사실은 또 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2018년 5월, “벤처기업 제한 업종 규제 확 풀렸다”는 보도자료를 내면서 기존에는 벤처기업 지정을 받을 수 없던 18개 업종을 허용해주었다. 이로 인해 벤처기업 인증이 가능해진 업종에는 기타 갬블링 및 베팅업, 피부미용업, 욕탕업, 마사지업 등이 포함됐다.
즉, 오늘날 한국에서는 욕탕업과 마사지업은 벤처기업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필자의 회사처럼 글로벌 디지털자산 커스터디 사업을 확장하려는 블록체인 인프라 기업은 ‘단란주점’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반면 해외를 보면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미국의 BitGo는 디지털자산 커스터디 업계의 선두주자로, 이미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지위를 확보했다. 또한 Anchorage Digital은 미국 최초의 연방 공인 디지털자산 수탁은행으로 성장했으며, 기업가치 30억 달러(약 4조 원) 이상을 인정받았다. 해외에서는 디지털자산 커스터디 기업들이 유니콘을 넘어 데카콘(기업가치 100억 달러 이상)을 넘보는 상황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디지털자산 커스터디 기업을 ‘욕탕업’보다 벤처성이 떨어지는 업종으로 공식 분류해버렸다.
중소벤처기업부는 2018년 10월, 블록체인 기반 암호화자산 매매 및 중개업을 벤처기업 제외 업종으로 지정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암호화자산 매매 및 중개와 관련해 비정상적인 투기현상, 유사수신, 자금세탁, 해킹 등 불법행위가 발생하고 있다.”
과연 타당성이 있는 행정조치인지 하나하나 따져보자.
첫째,
필자의 회사는 ‘암호화자산 매매 및 중개’를 하지 않는다.
DSRV는 디지털자산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커스터디 사업자다.
특정금융정보법상 가상자산사업자는 매매업자와 커스터디업자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가상자산사업자 라이선스’를 취득했다는 이유로 벤처기업 지위를 박탈하는 것은 명백한 법령 오남용이다.
만약 디지털자산 보관 및 관리업 또한 벤처기업 인증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최소한 시행령 개정이라도 하고 나서 인증 취소 절차를 밟아야 한다.
둘째,
비정상적 투기나 불법행위가 문제라면, 그 행위를 저지른 ‘개별 기업’을 처벌하면 될 일이다.
모든 산업에는 그림자가 있다. 하지만 그 이유로 전체 업종에 낙인을 찍는 것은 행정 편의주의일 뿐이다.
더구나 필자의 회사는 특정금융정보법상 자금세탁 방지 체계를 갖추어 당국 심사를 통과한 회사다.
라이선스를 발급받자마자 벤처기업 인증을 취소한 것은 스스로 밝힌 기준에도 모순된다.
셋째,
설령 매매 및 중개업을 겨냥했다고 해도 시대착오적이다. 미국의 코인베이스는 상장 당시 기업가치 100조 원을 돌파했고, 일본의 코인체크도 나스닥 입성에 성공했다. 지난 3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비트코인과 일부 디지털자산을 전략비축자산으로 지정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전 세계가 디지털자산 산업을 국가 성장 전략으로 삼고 있는 와중에, 우리는 7년 전의 규제를 그대로 끌어안고 있다. 이쯤 되면, 19세기 말 서양 문물을 거부하던 구한말 유생들의 모습이 떠오를 지경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결국 하나다. 국내 정책당국의 디지털자산과 블록체인 산업에 대한 이해 부족.
이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보다 깊이 다루어볼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회사는 벤처기업 인증 취소 처분에 대해 의견서를 제출하는 한편, 벤처기업 인증 취소 금지 가처분 신청도 준비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정부랑 싸워서 좋을 게 뭐 있냐”고 말리기도 했다. DSRV 매출의 95%는 해외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창업자들은 한국에도 글로벌과 경쟁할 수 있는 블록체인 기술 기업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신념, 그리고 이 나라의 젊은 인재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지난 7년을 버텨왔다. 사실 지금도 법인을 해외로 옮기면 투자해 주겠다는 글로벌 투자자들의 제안을 수시로 받는다.
그럼에도 굳이 남아 끝이 뻔한 싸움을 택한 이유는 하나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한국 시장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참고:
• BitGo: 디지털자산 커스터디 유니콘, 기업가치 약 17억 달러(2024년 기준)
• Anchorage Digital: 미국 OCC(통화감독청) 인가를 받은 첫 디지털자산 은행, 기업가치 약 30억 달러
• 코인베이스: 나스닥 상장, 시가총액 최고점 기준 약 100조 원
• 코인체크: 나스닥 상장 성공, 모회사 Monex Group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