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언 테트 파이낸셜타임즈 편집국장은 "FTX 사태는 암호화폐 산업에 대한 재평가를 촉발했다는 점에서 리먼 브라더스 사태와 동일 선상에 있다"면서 "암호화폐 시장은 끝나지 않았지만 이상적이지 않은 형태로 양분될 가능성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아래는 10일자(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즈 칼럼.
암호화폐 시장이 더 나빠질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더한 일이 발생했다. 촉망받던 30세의 창업가 샘 뱅크먼 프리드 FTX CEO는 암호화폐 중개업체 FTX와 투자 펀드 '알라메다리서치'로 구성된 320억 달러(한화 약 42조원) 규모의 생태계를 감독했다. 스포츠 후원자이자 자선가였고 블랙록 같은 주류 금융기관의 지원을 받았다. 최근 컨퍼런스에서 샘 뱅크먼을 본 일이 있는데 월가와 워싱턴(정계) 인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더 이상은 아니다. 이번 주 샘 뱅크먼은 FTX에서 60억 달러(한화 약 7조9440억원)의 대규모 인출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이자 경쟁 거래소 바이낸스에 매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FTX는 80억 달러(한화 10조5960억원) 상당의 자금을 충당하지 못하면 파산할 위기다. (11일 기준 챕터 11 파산 신청)
FTX 사태는 암호화폐 업계에서 2008년 금융위기의 시작, 리먼 브라더스 사태를 재현했다. 주류 금융 시장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다. 현재 암호화폐 생태계는 약 1조 달러 규모로, 전년 대비 3분의 1 수준이며 많은 토큰이 사용처가 제한적이다.
FTX는 리먼 파산이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던 것처럼 암호화폐에 대한 재평가를 촉발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FTX 사태는 값싼 법정화폐 가치에 부풀어올랐던 암호화폐 시장 거품을 수축시켰다. 암호화폐는 중앙은행 개입을 방어할 수 있는 '헤징' 방안으로 간주됐었지만 역설적으로 '중앙은행의 통화 긴축 정책이 리스크 선호 투자 활동을 얼마나 위험하게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가 됐다.
◇ FTX 사태가 드러낸 암호화폐 시장 취약점 2가지
FTX 사태가 암호화폐의 종말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대적인 규제 개혁이 없는 한, 한동안 주류 투자자와 기관이 대거 빠져나갈 것이라고 본다. FTX 붕괴는 암호화폐 산업이 가진 2가지 아킬레스건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나는 대차대조표가 불투명해서 디지털 토큰을 뒷받침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다.
FTX와 알라메다는 자본력이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하지만 지난주 알라메다의 대차대조표가 대부분 FTX의 자체 발행 토큰 FTT로 구성돼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FTX가 공식 인정한 부분은 아니다. 드러난 부분은 창펑 자오 바이낸스 CEO가 FTT 보유량을 처분한다고 트윗을 올린 후, 토큰 가격이 폭락하고 샘 뱅크먼 생태계가 붕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불투명성 때문에 치른 비용이 상당하다.
두 번째는 수탁(custody) 문제다. 암호화폐 산업 내 수탁은 오랫동안 낙제점을 받아왔다. 샘 뱅크먼의 생태계는 암호화폐 업계의 중개업체이자 프랍 트레이더였고 동시에 대출기관이자 수탁업체였다. 이들이 가진 막대한 자산은 재담보에 활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암호화폐 업계의 철학인 '탈중앙화'에 역행해 '권력의 집중'을 만들었다는 두 번째 역설이 여기에서 확인된다. 이는 고객이 자금을 회수하지 못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암호화폐 업계에 투자자 안전망, 즉 최종대출자(중앙은행)가 부재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파장이 클 수 있다.
법정화폐 기반의 고루한 금융 시장에 적용되고 있는 동일한 규제 원칙을 도입한다면 이론적으로 암호화폐 산업의 취약점도 해결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주류 투자자들이 계속 시장에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초당적 법안들은 의회에서 계류되고 있고, 암호화폐 업계는 규제에 관해 합의를 이루지 못한 상태다.
이번주 창펑 자오 바이낸스 CEO는 FTX가 자체 토큰을 담보로 사용하고 충분한 준비금 없이 대출한 것을 비판하며 다수의 투명성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하지만 창펑 자오는 FTT 토큰을 처분하면서 "다른 업계 플레이어에게 불리한 로비 활동을 벌이는 사람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댔었다. 이는 규제기관과 함께 한 일에 대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기관 투자자에게 우려가 되는 지점이다.
◇ 암호화폐 시장은 계속된다
모든 암호화폐가 끝이 날 것이라고 보진 않는다.
우선, 자유주의적 이념 때문이든 불법 행위를 위해서든 중국 같은 국가에 자금을 빼돌리기 위해서든 여전히 정부 통제력을 벗어나기 위해 디지털 자산을 사용하는 시장 참여자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FTX 사태는 이런 현실을 바꾸지 않을 것 같다. 미국 규제기관은 지속적으로 테더의 대차대조표 부실을 비판해왔지만 테더는 여전히 세계 최대 스테이블코인으로 남아있다.
두 번째는 민간 암호화폐 가치가 줄더라도 정부에서도 관련 기반 기술 일부를 카피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데, 이 실험은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중국과 유럽연합에서 민간 디지털 자산을 CBDC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개인 간 사용이 가능한 소매용 CBDC는 빠르게 부상할 수 없겠지만 많은 국가들이 도매용 CBDC가 유용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는 규제 하에서 민간 부문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수용할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FTX 사태는 암호화폐 미래를 끝내지 않았다. 다만, 자유주의자들이 처음 암호화폐를 발명하며 기대한 것과 달리, 어두운 역외 활동과 냉정하고 엄격히 통제되는 중앙은행 실험으로 양분될 수 가능성을 한층 높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