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 시대 금융 시스템의 새로운 기반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스테이블코인의 활용은 이제 실험이 아닌 현실이다. 미국, 유럽, 아시아 주요국들은 민간이 주도하는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며 빠르게 확산시키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에 따르면, 2024년 한 해 동안 스테이블코인 이체 총액은 무려 27조 6천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같은 기간 비자(Visa)와 마스터카드의 거래량을 합친 규모를 초과한 수치다. 전통 금융 시스템이 구축해온 글로벌 결제 네트워크를 민간 디지털 화폐가 실질적으로 대체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은 방향을 분명히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발행을 명확히 반대했고, 이를 연방 차원에서 법적으로 금지하는 조치를 추진하고 있다. 대신 달러 기반 민간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해 국제 금융 네트워크로 확장하려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는 달러 패권을 유지하는 동시에 민간의 혁신 동력을 인정하겠다는 정책적 판단이다.
이러한 기조 아래 미국에서는 실제 상업용 스테이블코인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JP모건은 ‘JPM 코인’을 통해 기관 간 대규모 송금 거래를 처리 중이며, 누적 송금 규모는 4,000억 달러 이상이다. 페이팔도 자체 스테이블코인 ‘PYUSD’를 출시해 미국 내 결제·송금 플랫폼에 통합했다. 서클(USDC) 역시 글로벌 결제사들과 연동되며 상용 결제망으로 확장 중이다. 이들은 단순한 실험이 아니라 민간 주도의 디지털 달러 생태계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중앙은행 중심의 실험단계에 머물러 있다. 물론 변화는 있다. 한국은행은 2025년 4월부터 ‘예금토큰’을 활용한 CBDC 시범 실험 ‘디지털 한강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0만 명의 일반 국민이 참여해 디지털 원화를 활용한 실거래 결제를 실험하고 있다. 금융결제원과 시중은행이 참여하고, 디지털 채권과 증권의 토큰화 결제도 포함된다. 이는 진일보한 시도다. 그러나 구조는 여전히 폐쇄적이며, 민간 생태계와의 연계는 미비하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민간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규제 접근이다. 국회에서는 디지털자산 기본법을 통해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금융위원회의 사전 인가 대상으로 규정하려는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가상자산 업계의 반발이 거세다. 해외 스테이블코인은 규제 사각지대에서 유통되는데, 국내 프로젝트에만 인허가 요건을 부과하는 것은 명백한 형평성 문제다.
더 큰 문제는 방향이 없다는 점이다. 인허가 중심의 규제안은 발행 주체, 활용 목적, 감독 방식에 대한 구체적 정의 없이 등장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규제가 아니라 설계다. 결제용, 담보용, 자산연동형 등 다양한 유형의 스테이블코인에 따라 분류와 기준을 구분하고, 이를 기반으로 민간 참여가 가능한 체계를 정비하는 일이 우선이다.
외환 규제도 걸림돌이다. 한국은 IMF 기준상 여전히 ‘부분적 자본통제국가’로 분류된다. 외국환거래법은 디지털 자산 기반 해외 송금이나 크로스보더 결제를 구조적으로 막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해 해외 결제나 무역을 수행하려는 기업이 있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다. 반면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 미국 등은 외환 유연화를 통해 스테이블코인을 글로벌 활용 도구로 수용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선택이 아니라 병행이다. CBDC는 정부 정책 통화로, 스테이블코인은 민간의 시장형 통화로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다. 하나는 정부의 정책 수단, 다른 하나는 민간 혁신 기반이다. 한국이 글로벌 디지털 금융 중심국가를 지향한다면, 양자를 동시에 전략화해야 한다. 통제보다 설계가 먼저이고, 규제보다 활용 기반 구축이 앞서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은 더 이상 ‘하면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이는 디지털 시대 금융주권의 핵심이며, 민간의 혁신이 가장 먼저 꽃피는 접점이다. 외환 정책, 발행 규제, 활용 가이드라인 등 모든 제도는 ‘차단’이 아니라 ‘활용’ 중심으로 재설계돼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스테이블코인을 ‘통제의 대상’이 아닌 ‘전략의 자산’으로 전환할 때다. 디지털 경제의 진정한 주도권은 민간과 정부가 함께 설계하는 생태계 안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