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테라 붕괴 사태 이후 스테이블코인의 가격 안정성에 대한 믿음은 깨졌지만, 규제에 필요한 국내의 제도 확립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우려가 늘고 있다.
권도형 전 테라폼랩스 대표가 만든 스테이블코인 테라(UST)는 시장가격이 1달러(한화 약 1250원) 아래로 하락하더라도 1개의 테라로 1달러의 가치만큼 루나(LUNA) 코인으로 교환되게 함으로써 두 코인을 이용한 차익거래를 통해 가격이 유지되도록 설계됐다.
하지만 테라 예치자에 대한 과도한 이자 지급으로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커진 가운데, 지난해 5월 테라는 알고리듬의 허용 범위를 넘어선 자금 유동성 경색으로 1달러 가치를 유지하지 못하고 폭락했다.
테라 블록체인에서 사용하는 스테이블코인이 가치 유지에 실패하자 해당 스테이블코인을 기반으로 한 다수의 블록체인 경제 시스템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가상자산 업계는 테라 붕괴 사태의 주요 원인을 불완전한 알고리즘과 생태계적 한계라 지적했다.
테라 사태 한 달 뒤인 지난해 6월, 한국블록체인협회는 '루나 테라 사태 보고서'를 발표해 "스테이블코인 테라는 알고리즘 구조상 담보가치의 역전이 일어날 경우 그 가치를 보장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며 "테라 블록체인 기반 탈중앙화 저축 시스템인 앵커프로토콜 역시 담보자산의 가치가 예치자산의 가치의 2배 이상이 돼야 작동 가능한 형태였다"고 분석했다.
◇ 스테이블코인, 대다수 가상자산 거래에 활용...가격 하락 위험은 여전
테라의 붕괴는 스테이블코인의 리스크에 대해 위기감을 갖는 계기가 됐지만, 테라 사태를 겪은 후에도 스테이블코인은 여전히 가상자산 거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코인 거래 시 암호화폐 그리고 법정통화 간 교환에서 발생하는 수수료나 시간 지연 문제를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스테이블코인의 시가 총액은 약 1504억 달러(한화 약 188조 1504억원)로 지난 2019년말에 비해 30배 가까이 그 규모가 확대됐다.
사진 = 가상자산 거래의 결제수단별 비중 / 자본시장연구원
아울러 지난해 8월 말 기준 전체 가상자산 거래에서 스테이블코인 테더(USDT)를 이용한 비중은 50.2%, USD코인(USDC)은 25.7%, 바이낸스 스테이블코인(BUSD)는 11.3%를 차지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이용한 가상자산 거래가 전체 중 87.2%를 차지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스테이블코인에 상존하는 리스크를 준비자산 운영·가상자산 시세·외부 효과 측면으로 나눠 설명한다. 장보성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해 12월 29일 '스테이블코인의 리스크와 정책 과제'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해 미래에 발생 가능한 문제들을 정리했다.
장 연구위원은 보고서를 통해 준비자산 운영에 관한 스테이블코인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는 "실제 법정통화를 준비자산으로 삼는 스테이블코인에서 발행사가 여러 이유로 준비자산을 부실 운영할 수 있으며 이것이 근본적인 불안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발행사가 발행한 스테이블코인 수량에 비해 준비자산이 부족할 수 있고,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이윤극대화를 목적으로 고수익 위험자산에 준비자산을 투자하려는 유인이 높기에 가치를 잃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사진 = 주요 스테이블코인의 준비자산 구성 / 자본시장연구원
가상자산 시세가 하락할 때 스테이블코인 대량 매도가 발생해 가격이 내려갈 수 있다는 점도 주요 불안 요소다.
장 연구위원은 "비트코인 등 주요 가상자산의 불안으로 투자자가 대규모로 동 시장을 이탈한다면 스테이블 코인의 대량 매도와 가격 하락 압력이 발생할 수 있다"며 "발행사의 준비자산 부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스테이블 코인의 가격이 하락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스테이블코인이 직접적으로 증권·예금 등 전통금융시장에 미치는 '외부 효과' 측면의 리스크도 주목을 받는다.
장 연구위원은 "법정화폐를 담보로 삼는 스테이블코인은 예금, 단기증권, 대출 등을 준비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는데, 실제 화폐로 스테이블코인을 인출하려는 수요가 급증한다면 발행사는 준비자산을 대량 처분할 필요성이 커진다"며 "이 경우 스테이블 코인 시장의 불안이 전체 금융시장으로 전이될 위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외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사용이 확대될 때 해당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경우, 자본 유출이 확대되면서 국내의 금융중개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중앙은행이 긴축적 통화정책을 운영하고 있는 와중에 스테이블코인이 대규모로 무상지급(airdrop)된다면 통화정책의 긴축 효과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사진 = 셔터스톡
◇ 세계 각국, 선제적 규제 힘써...한국은 법안 제출도 '아직'
이같은 리스크가 잠재돼있는 스테이블코인을 상용화하기에 앞서 각국은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규제 마련에 힘쓰고 있다.
일본 금융청은 지난해 6월 스테이블 코인 규제와 자금세탁 대책 강화 내용이 포함된 자금결제법을 개정한 데 이어, 지난해 12월 26일(현지시간) 자금결제법 시행에 관한 내각부령과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해당 규제는 스테이블코인 중 법정통화의 가액과 연동한 가격으로 발행돼 발행가격과 같은 금액으로 상환을 약속하는 것을 '전자결제수단'으로 규정했다. 아울러 일본 금융청은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발행자 규제, 진입 규제와 발행자·거래업자에게 자산 보전 의무를 부과하는 이용자 보호책을 구체화할 계획이다.
홍콩통화청(HKMA)은 지난 1일(현지시간) 스테이블코인 발행자는 실제 암호화폐(가상자산) 유통량 이상의 준비금을 유지할 의무를 규정한 라이선스 규제책을 도입한다고 밝혔다.
홍콩통화청 관계자는 “스테이블코인 준비 자산은 높은 유동성을 지녀야 한다”며 “이번 규제에 대해 대국민 의견수렴을 거친 뒤 국제적 의견수렴을 거쳐 이르면 올해, 늦어도 내년쯤 해당 조치를 시행할 것이다”고 예고했다.
유럽연합(EU)의 경우 가상화폐 감독안 '미카(MiCA)'를 통해 중요성이 떨어지는 스테이블코인은 준비자산 6개월 평균잔액의 2%를, 중요 스테이블코인은 3%를 발행사가 자기자본으로 보유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또한 미카 규정에 따르면, 발행량의 100% 이상을 안전자산으로 담보하는 가상자산만 스테이블코인으로 인정되며 중앙은행의 권고로 인가 거부나 취소가 가능하다.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주체와 발행량을 국가가 통제하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세계적 규제 추세와 더불어 한국은행 역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는 비은행에 은행 수준 규제를 부과하고 빅테크의 발행은 인허가 여부 등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스테이블코인의 건전성 관리를 위해서는 적절한 자본·유동성 비율 준수의무를 부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천창민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지난 2021년 12월 발표한 논문에서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는 가상자산 관련 법안이 제출되어 있으나, 가상자산의 일종인 스테이블코인 규제에 관한 내용을 담은 법안은 발견할 수 없다"며 "이는 그간 우리나라가 관련 국제적 논의에서 상당히 뒤처져 있다는 것을 그대로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이로부터 1년이 넘게 지난 현재까지 국회에서는 가상자산 시장에 관한 기본법 제정만이 논의되고 있을 뿐, 스테이블코인의 특징적인 문제점을 규제하는 법안은 상정되지 않았다.
국회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스테이블코인 규제 강화라는 큰 틀만 정해진 상태다"며 "외국의 입법사례를 참고한다면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도 적절한 시기에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