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일하고 있는 블록체인 인프라 기업 DSRV는 지난주 금요일, 도쿄 도심 한복판에서 일본 기업 관계자 200여 명 앞에 섰다. 당사가 구축한 블록체인 인프라와 제품군을 소개하는 쇼케이스 자리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은 일본의 대기업, 은행, 증권사, 통신사 등의 중역들이었고,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3~4년 전부터 일본 정부는 웹3를 ‘제2의 인터넷’으로 정의하며, 제도 정비와 투자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왔다. 실제로 일본 상장사들이 보유한 디지털자산 규모는 2024년 말 기준 약 5조 엔(약 45조 원) 수준으로 파악된다. 일본 재무성이 공개한 회계기준 변경 이후 자산 내역이 투명하게 집계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수치다. 한국이 이제야 법인의 디지털자산 보유를 허용하는 단계에 진입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렇다고 한국 기업들이 기술력에서 밀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기술 자체에 대한 일본 업계의 평가 기준이 매우 엄격한 가운데, DSRV가 최근 선보인 비트코인 스테이킹 서비스는 큰 주목을 받았다. 바빌론(Babylon)이라는 새로운 프로토콜 기반으로, 비트코인을 단순히 보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커스터디와 동시에 스테이킹을 통해 토큰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 측은 깊은 관심을 보였다.
디지털자산은 무가치한 ‘디지털 신호 쪼가리’가 아니다. 대표적으로, 이더리움 네트워크는 탈중앙화된 월드컴퓨터이자 금융 플랫폼이다.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선 밸리데이터(Validator), 즉 검증인이라는 탈중앙화된 주체들이 필수다. DSRV는 바로 이 역할을 수행한다. 이더리움을 포함해 솔라나, 수이 등 70여 개 글로벌 네트워크의 블록 생성 및 검증을 책임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전 세계에서 실시간으로 보상을 얻는 구조다. 이더리움이라는 탈중앙화된 인센티브 시스템을 통해 어느 누구의 지시 없이도 전 세계 수억의 참여자들이 자발적으로 거래를 검증하여 보상을 얻고,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전 세계로 실시간으로 가치를 전송한다. DSRV는 이러한 거래 검증을 통해 2024년 한 해 동안만 약 1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다.
또한, 지난해 9월 한국 금융당국으로부터 커스터디 라이선스를 획득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글로벌 대상의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 시스템도 전개 중이다. 아시아의 관광지에서 QR 결제 한 번이면 원화, 달러, 엔화를 넘나드는 일상이 머지않았다.
그런데, 도쿄 쇼케이스 준비로 분주하던 중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DSRV가 벤처기업확인 취소대상이 되었다’는 중소벤처기업부의 안내 문자였다. 블록체인 기술로 청년 고용을 창출하고 세계 시장을 두드리는 기업에 ‘단란주점업과 유사 업종’이라는 낙인을 다시 찍은 셈이다.
일본의 사업자들은 우리가 한국 금융당국의 가상자산사업자 라이선스를 취득한 점을 높게 평가했는데, 한국 정부는 가상자산사업자 라이선스를 취득했다는 그 이유로 기존에 보유한 벤처기업 자격을 취소한 것이다. 도쿄 시부야 한복판의 행사장에서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육성 기조와 한국 정부의 경직된 인식 사이, 두 정부의 온도차가 뼈아프게 느껴졌다.
한국은 바야흐로 대선의 계절이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비트코인 전략자산 비축, 스테이블코인 발행 확대를 통한 달러 패권 강화 시도, 글로벌 블록체인 기업의 영토 확장 시도 속에 한국 정치권도 ‘디지털자산 기본법’ 등 고무적인 약속들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가장 먼저 논의돼야 할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 디지털자산은 정말 무가치한가?
• 디지털자산에 투자하는 MZ세대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가?
• 2017년의 ‘가상자산 행정지도’는 여전히 유효한가?
• 한국에서 글로벌 블록체인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은 여전히 벤처기업으로서의 자격이 없는가?
그 질문에 대한 정부의 대답을, 이제는 들을 수 있어야 한다. DSRV 같은 기업들이 국내를 떠나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