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에이전트가 가계 자금을 자동으로 관리하면 은행의 저금리 예금이 고금리 계좌로 동시에 이동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이 경우 은행이 대출 재원으로 활용해온 저원가 예금 기반이 약해질 수 있다.
토르스텐 슬록(Torsten Slok)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27일 보고서 ‘에이전틱 뱅크런이 다가오는가’에서 이 같은 가능성을 제기했다. 슬록은 “모든 가계가 AI 에이전트를 이용해 현금 잔액의 수익률을 최적화한다면 은행은 대출에 활용하는 저원가 예금의 상당 부분을 잃을 수 있으며 이는 전체 금융 시스템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폴로 보고서
‘에이전틱 뱅크런’은 예금자가 공포에 빠져 돈을 인출하는 기존 뱅크런과 다르다. AI 에이전트가 여러 금융회사의 금리를 비교해 수익률이 높은 계좌로 자금을 옮기고, 청구서 결제 시점에 맞춰 필요한 돈을 다시 이동시키는 시나리오다.
이 시나리오의 출발점은 금리 차이다. 미국 당좌예금의 전국 평균 금리는 0.1% 수준인 반면 리볼루트(Revolut), 소파이($SOFI), 바로(Varo), 렌딩클럽($LC), 웰스프론트(Wealthfront) 등 일부 핀테크·온라인 금융 계좌는 3.3~5% 금리를 제공한다.
금리는 예금자가 자금을 어디에 둘지 결정하는 주요 기준 중 하나다. 금리 비교와 계좌 이동에 드는 시간과 수고가 줄어들면, 기존 예금의 ‘끈적한’ 성격도 약해질 수 있다는 게 슬록의 분석이다.
은행은 낮은 금리로 조달한 예금을 대출 등에 활용한다. 예금자가 직접 상품을 비교하고 계좌를 옮기는 과정이 자동화되면 은행이 안정적인 자금원으로 여겨온 저원가 예금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
위험은 여러 AI 에이전트가 같은 기준으로 동시에 움직일 수 있다는 데 있다. 수많은 이용자가 더 높은 금리를 찾도록 AI에 지시하면 비슷한 시기에 같은 방향으로 자금이 이동할 수 있다.
영란은행은 2025년 4월 금융안정 자료에서 고도화된 AI 거래 전략이 금융회사들을 유사한 포지션으로 몰아 시장 충격을 키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란은행 자료
개인 금융정보에 접근하는 AI 서비스는 이미 등장했다. 메타 플랫폼스($META)의 개인용 AI 에이전트 뮤즈(Muse)는 플래드(Plaid)를 통해 계좌 잔액과 거래 내역, 투자자산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플래드 발표
현재 뮤즈가 직접 자금을 이체할 수 있다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슬록이 말한 에이전틱 뱅크런은 현재 진행 중인 예금 인출 사태가 아니라, AI 에이전트에 실제 이체 권한이 부여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가상 시나리오다.
가상자산 업계에서는 AI 에이전트의 결제를 지원하는 인프라도 구축되고 있다. 코인베이스($COIN)가 개발한 x402 프로토콜은 웹 요청에 결제 기능을 붙여 AI 에이전트와 애플리케이션이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한 결제를 처리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x402는 별도의 계정이나 카드, 사람의 직접 승인을 거치지 않고 온라인 서비스 비용을 결제하는 구조를 지향한다. 현재 x402 운영은 리눅스재단 산하 재단이 맡고 있다. 리눅스재단 발표
코인데스크는 x402 프로토콜의 누적 거래가 약 1억8800만~2억500만건에 달하고 활성 에이전트는 약 6만9000개라고 전했다. 클라우드플레어, 구글, 비자, 마스터카드, 아마존웹서비스, 써클, 스트라이프 등이 x402 재단에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토큰화 예금과 AI 에이전트의 결합이 은행의 유동성과 만기변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본지의 분석도 예금자가 직접 조작하지 않아도 은행 간 자금 이동이 빨라질 수 있다는 점을 다뤘다. 예금 이동 속도가 빨라지면 은행이 장기 자산을 보유하며 감수할 수 있는 금리 위험 여력이 줄어들 수 있다는 내용이다.
국내에서도 AI의 금융계좌 접근 권한과 은행 예금의 유동성 변화는 가상자산 결제 인프라와 함께 살펴볼 사안이다. 다만 이번 경고는 새 규제나 제도 변경을 발표한 것이 아니라 AI 에이전트가 실제 자금 이체까지 수행할 경우를 전제로 한 분석이다.
슬록의 경고는 AI가 곧바로 뱅크런을 일으킨다는 주장이 아니다. 저금리 예금에서 고금리 상품으로의 이동을 AI가 자동화하고 여러 이용자의 자금이 같은 시기에 움직일 경우 은행의 자금 기반이 약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서지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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