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5일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 국제통화기금)의 새로운 수장인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Kristalina Georgieva)는 ‘새로운 브레튼우즈 모멘트(A New Bretton Woods Moment)(주1)’라는 연설을 통해 새로운 기축통화 출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것은 만성적인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 더하여 코로나19 해결을 위한 재난지원 팩키지 등을 통해 전무후무한 통화량 증가를 시도하고 있는 미국 달러화가 기축통화의 지위를 상실하고 있다는 간접적인 경고였다.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을 통해 영국의 파운드가 갖고 있던 기축통화의 지위가 미국의 달러로 넘어가게 되었다. 게오르기에바 총재가 말한 브레튼우즈가 바로 이를 뜻한다(주2). 하지만 실질적으로 영국이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상실한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주3)이 끝난 1909년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유럽 인구 3분의 1을 죽음으로 몰고 갔었던 스페인 독감(주4)으로 인한 경제 파탄을 겪고 제1차 세계 대전을 통한 전쟁 비용으로 국가가 보유하고 있던 금의 거의 대부분을 상실하면서 1931년 9월에 영국은 파운드에 대한 금 태환 중지를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의 파운드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각 국은 당시 세계 금 보유량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던 미국의 달러로 자연스럽게 기축통화를 변경하였다. 당시 미국의 달러는 금으로 변환이 가능한 증서인 금태환 화폐였는데, 이는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미국의 달러를 통해서 자국 소유의 금을 보관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실질적인 세계 기축통화는 영국의 파운드나 미국의 달러가 아닌 금이었고, 단지 거래 은행을 영국에서 미국으로 변경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림 1. 금 교환권이었던 미국 달러
스페인 독감의 피해가 거의 없었고,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 걸친 전쟁 특수를 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미국은 1944년 브레튼우즈 협약을 통해서 전 세계 기축 통화의 지위를 공식화하기에 이른다. 당시 영국의 대표였던 존 메이너드 케인즈와 미국의 재무부 장관 차관보 해리 덱스터 화이트는 미국 뉴햄프셔주의 브레튼우즈에 모여서 차기 기축 통화를 결정한다. 특정 국가의 통화를 기축통화로 사용하는 문제점을 경험하였던 영국은 각국의 통화와 연동된 가상의 국제통화인 방코르(Bancor)(주5)를 제안하였지만 막강한 국력과 사실상 기축통화인 금의 전 세계 유통량의 80%를 보유한 미국의 주장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를 통하여 미국의 달러가 국제적으로 공인된 기축통화가 된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막대한 전쟁비용을 지불하였던 베트남전에서의 패배, 일본, 독일 등 신흥 경제 대국과의 무역적자 등으로 재정이 고갈된 미국의 기축통화 지위에 의심을 품는 국가들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이 달러를 금으로 태환해 갔고, 이를 지켜보던 영국이 마지막으로 대량의 금에 대한 교환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보유한 대부분의 금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이 요구를 들어주면 미국은 더 이상 교환해 줄 금이 남아있지 않게 되어 달러화가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긴급 행정명령을 통하여 금태환의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이후 미국 달러에 “우리가 믿고 있는 신을 바탕으로 (In god we trust)” 라는 문구가 추가되면서, 오로지 미국에 대한 신앙적 믿음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불태환(Fiat) 화폐의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그림 2. 불태환 화폐인 현재의 달러
달러의 금에 대한 연결고리가 끊어진 이후, 기축통화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고민하던 미국은 1975년 헨리 키신저 장관을 OPEC의 의장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해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보장받는 대신, 모든 오일의 국제 거래를 달러로만 진행하도록 하는 페트로 달러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흔들리던 달러의 국제 통화로서의 지위가 안정성을 되찾게 되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 국가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각 국가의 정부와 중앙은행은 경제난을 해소하기 위해서 전래 없는 규모의 양적완화를 통해서 통화량을 지속적으로 늘려나가고 있다. 이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로 미국이 2020년 추가로 발행한 달러의 규모는 약 3조 달러로, 이것은 미국이 지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10년간 발행한 통화량보다도 많은 양이다. 그럼에도 위기는 해소되지 않고 화폐 발행 양의 기하급수적 증가는 끝날 줄을 모른다. 문제는 달러가 기축통화이기 때문에 달러의 위기는 전 세계 화폐 경제 시스템의 위기로 직결된다는 것이다. 현재 각 국가가 안고 있는 부채의 규모나 통화량의 증가는 자연스러운 경제활동으로는 해소되기에는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에 따라 많은 곳에서 경제와 통화 시스템에 대한 재부팅 시나리오가 부각되고 있다. 그렇다면 미래의 국가화폐와 세계 공용 화폐는 어떠한 모습을 갖게 될까?
1988년 1월에 발행된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2018년 세계 단일 화폐인 피닉스가 발행될 것으로 예상하고 이를 표지 디자인에 올린 적이 있다. 이것은 유럽의 단일 화폐인 유로 이후 전 세계 통일 화폐의 출현을 예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반하여 영국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화폐의 국가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고 기업이나 지방정부 등 각 경제의 주체들이 다양하게 자신만의 화폐를 발행하고, 시장 경쟁력이 우수한 화폐가 시장원리에 의해 선택되어 널리 사용되는 모델을 주장한 바 있다. 이 경우, 각 화폐 간 원활한 환전을 위해서 기준점을 제시하는 기준 화폐를 필요로 한다.
그림 3. 시장화폐의 필요성을 역설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이와 더불어 최근 발생했던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을 통해 현 기축통화 시스템이 가진 문제가 드러나게 되었다. 특정 국가의 화폐를 기축통화로 사용할 경우, 기축통화의 전 세계 보급을 위해서 기축통화국은 무역적자를 용인할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기축통화의 가치를 보장하는 기축통화국의 담보자산이나 신용도의 하락을 가져와 기축통화의 가치가 떨어지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의 이면에는 지속적인 무역적자로 기축통화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는 미국과 무역흑자를 통하여 부를 축적한 중국의 기축통화 패권에 대한 도전이 자리 잡고 있다.
무역전쟁에서 시작한 기축통화 경쟁은 최근에 다시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개발 경쟁으로 옮아간 분위기이다.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는 스웨덴처럼 화폐의 디지털화가 거의 완료된 국가에서 처음 대두되어 파일럿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2015년 기준, 스웨덴의 지폐 사용량은 GDP의 2% 이하로,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지 못하는 저소득층의 경제활동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이를 위하여 2020년부터 디지털 화폐 파일럿 프로젝트에 들어갔지만 엔터프라이즈 블록체인 기술의 한계로 인하여 실제 사용은 지연되고 있다.
그림 4. 스웨덴의 E-Krona
더 나아가, 전 세계 중앙은행의 디지털 화폐 개발을 촉진시킨 계기가 된 것은 2019년 페이스북의 리브라(Libra) 개발 선언이었다. 전 세계 25억 명의 사용자를 보유한 페이스북의 리브라가 상용화될 경우, 각 국가 화폐의 사용량이 급격히 줄어듦과 동시에, 각국 화폐 주권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위협을 느낀 국가는 중국이었다. 중국의 위안화는 국제통화기금의 특별인출권 배분에 속해 있는 국제 통용화폐임에도 불구하고, 리브라의 통화 담보 바스켓에서는 중국의 위안화를 제외시키고 싱가포르 달러를 포함시켰으며, 미국 달러의 배분을 향상시켰다.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각국의 반발에 직면한 페이스북과 리브라 연합은 현재 디엠(Diem)(주6)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통화바스켓 정책도 폐기하였지만 디엠의 개발 계획 발표는 전 세계 중앙은행에 큰 충격을 주었다.
모바일 페이먼트 사용량이 전체의 80%를 넘고 알리페이와 위챗 페이의 마켓셰어가 모바일 페이먼트의 90%를 넘는 중국은 사실상 디지털 화폐 사용국가이다. 페이스북에 위기감을 느낀 중국 정부는 디지털 화폐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2022년 북경 동계 올림픽 상용화를 목표로 진행하고 있다. 빠른 상용화를 위해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 기존의 모바일 페이먼트와 동일한 방식인 디지털 페이먼트 기술을 바탕으로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다.
국가화폐의 디지털화를 성공한 국가가 국제 기축통화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종이 라는 물리적 한계를 가진 지폐에 비해서 디지털 화폐는 비용과 시간의 한계 없이 전 세계에 즉시 보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지털화만으로는 당연히 국제 화폐의 지위를 가질 수는 없다. 현재 가장 유력한 차기 기축통화의 후보는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 국제통화기금)의 SDR(Special Drawing Right – 특별 화폐 인출권)이다. 그렇지만 SDR는 달러, 유로, 엔, 위안 등에 통화바스켓에 연동된 가상의 기준화폐이기 때문에 실제 화폐로 쓰이기 위해서는 각 국가에서 SDR 화폐 또는 그와 연동된 스테이블 화폐를 발행해야만 한다.
미래의 기축통화는 특정 패권국가의 화폐보다는 다양한 국가에서 발행된 화폐의 묶음에 연동된 화폐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각 국가는 자국의 경제발전과 화폐 발행 수익을 보장받기 위해 국가 주권 화폐의 발행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물리적 형태의 종이 화폐는 사용량 저조로 인하여 발행 유지 비용 대비 효용성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고, 현금 사용으로 인한 지하경제 문제, 지폐를 통한 전염병 감염 문제 등으로 외면받고 있다. 반면 중국과 같이 중앙 집중적 방식의 디지털 페이먼트 기반의 디지털 화폐는 해킹으로 인하여 전체 화폐 시스템이 마비될 수 있는 위험이 있어 쉽게 도입하기 어렵고, 블록체인 기술은 기술적 한계로 인하여 상용화에는 갈 길이 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디지털 화폐 기술의 출현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순간이다.
기고자 소개
소버린월렛의 윤석구 대표는 KAIST 전자공학 학사, 미국 USC 컴퓨터사이언스 석사를 졸업한 소프트웨어 보안전문가이다. 소버린월렛은 미국 USC대학 출신들이 함께 설립한 회사로, USC대학의 비터비 공과대학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세계 최초의 신원인증 기반 블록체인인 무이 메타블록체인(MUI MetaBlockchain)을 개발했다. 무이 메타블록체인은 클라우드형 블록체인 서비스로(BaaS - Blockchain As A Service)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발행 및 디지털 증권 거래소 플랫폼 구현 등에 특화돼 있다. 현재 전 세계 7개국 국가 중앙정부 및 은행들과 CBDC 및 디지털 증권 거래소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CBDC 연재 기고를 통해 앞으로 CBDC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