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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원화 주권은 세금 고지서로 지킬 수 없다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7년 시행 예정인 암호화폐 과세를 미루자고 제안했다. 손실을 다음 해 이익에서 공제하지 못하고 해외 거래 내역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만큼, 세금을 걷을 준비부터 갖추자는 주장이다. 맞는 말이다. 한 해 1000만원을 잃고 이듬해 1000만원을 벌어도 세금이 나올 수 있는 제도를 공정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과세를 미룬 뒤에도 세금 계산법만 고친다면 더 큰 기회를 놓친다. 국회가 답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앞으로 디지털 시장에서 한국 기업과 국민은 원화를 무엇에, 어떻게 쓸 수 있는가. 원화가 거래소에 입금할 때만 쓰이고 실제 결제와 자산 거래에는 외국 통화 기반 코인이 쓰인다면, 세금을 아무리 잘 걷어도 원화의 영역은 넓어지지 않는다.

일본 엔화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 JPYC가 최근 업비트 원화마켓에 상장됐다. 이제 원화로 엔화 기반 코인을 살 수 있다. JPYC 하나가 원화를 위협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다른 나라 통화에 연동된 코인은 국내 시장에 들어오는데, 정작 원화에 연동된 코인을 누가 발행하고 어떤 결제에 쓸 수 있는지 정하는 법은 아직 갖추지 못했다. 이용자가 더 편리한 서비스를 선택하는 시대에 원화를 쓰라고 당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원화로도 편리하게 결제할 길을 열어야 한다.

그 길의 출발점은 믿을 수 있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다. 발행사가 받은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보유자가 약속한 조건에 따라 원화로 돌려받을 수 있어야 한다. 준비자산을 공개하고 자금세탁과 외환 거래도 감독해야 한다. 발행을 허용하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기업이 상품 대금을 지급하고, 이용자가 서비스를 사고, 해외 거래 상대방도 원화를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쓸모가 있어야 한다.

한국 기업이 디지털 시장에서 사업을 시작할 길도 필요하다. 국내 거래소에서 해외 프로젝트의 코인은 거래되지만, 국내 기업이 ICO를 통해 코인을 발행할 때 따를 명확한 절차는 부족하다. 금융당국이 2017년 발표한 포괄적 금지 방침을 발행사의 신원과 사업 내용, 자금 사용처를 공개하고 거짓 설명에 책임을 묻는 규칙으로 바꿔야 한다. 발행을 허용한다고 거래소 상장까지 보장할 필요는 없다. 사업을 시작할 적법한 문과 투자자를 보호할 기준을 함께 만들자는 것이다.

정보 공개가 왜 중요한지는 본지 토큰워치 조사가 보여준다. 국내 상장 프로젝트에 일반 투자자처럼 연락했을 때 답변이 온 곳은 8%였고, 140곳 이상은 공개 이메일 주소도 찾을 수 없었다. 답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문제가 있는 프로젝트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투자자가 발행 주체에게 질문할 길조차 없는 시장을 그대로 두고 국내 발행만 막아서는 신뢰를 얻기 어렵다. 국내외 모든 발행사에 책임 있는 정보 공개를 요구해야 한다.

실물자산을 토큰으로 만드는 RWA 시장에서도 원화의 자리를 생각해야 한다. 한국의 채권이나 부동산 관련 권리를 토큰으로 거래한다면, 그 권리가 무엇인지 법으로 분명히 하고 대금을 원화로 지급할 수 있어야 한다. 자산은 한국에서 만들면서 결제는 외국 통화 기반 코인에만 의존하는 시장을 당연한 미래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한국 기업이 발행과 결제 기술을 함께 키워 세계에 팔 수 있도록 규칙을 설계해야 한다.

국가에는 과세할 권한이 있다. 그 권한의 원천은 국민이며, 어떤 돈과 서비스를 쓸지는 결국 국민과 기업이 결정한다. 공정한 세금, 발행사의 책임, 실제로 쓸 수 있는 원화 결제망이 함께 마련돼야 정책도 신뢰를 얻는다.

국회가 과세를 유예한다면 유예 기간의 할 일과 시한을 법에 못 박아야 한다. 손실 공제와 해외 거래 신고를 고치고,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상환 규칙과 책임 있는 ICO 절차, 토큰화된 자산의 권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세금을 걷는 날만 뒤로 미루고 이 일을 또 미룬다면 유예는 핑계에 그친다. 원화 주권은 세금 고지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원화를 선택해 실제로 쓸 수 있는 시장에서 지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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