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의 기술적 성능이 높아져도 기업 업무에 곧바로 적용되거나 시장에서 널리 쓰인다는 보장은 없다.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과 시장에서 채택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도이체방크(Deutsche Bank) 연구원은 보고서 ‘AI 종말: 형편없었던 기술 예측의 간략한 역사’에서 AI의 미래를 낙관론이나 종말론만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할지뿐 아니라 실제 도입 시점과 사회적 수용 방식, 경제적 영향까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보고서는 과거 기술 예측의 실패 사례를 근거로 들었다. 기술의 성능이나 가능성을 전망하는 일과 그 기술이 실제 사회와 산업에 정착하는 시점을 예측하는 일은 서로 다르다는 취지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34년 핵에너지가 실제로 활용되기 어렵다고 봤다. 그러나 10년이 지나지 않아 인류는 지속적인 핵분열 연쇄반응을 구현했다.
인터넷을 둘러싼 예측도 빗나갔다. 이더넷 공동 발명자인 밥 멧칼프(Bob Metcalfe)는 1995년 인터넷이 이듬해 ‘장엄하게 붕괴할 것’이라고 전망했고, 예측이 틀리자 당시 전망을 담은 글을 직접 갈아 마셨다.
AI 분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딥러닝의 선구자인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은 2016년 딥러닝이 5~10년 안에 영상의학과 의사를 넘어설 수 있다며 의료 시스템이 영상의학과 의사 양성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이체방크는 지난 10년간 영상의학과 의사 수가 오히려 약 10% 늘었다고 설명했다. AI가 영상 판독의 일부 업무를 자동화하더라도 결과 해석, 임상적 판단, 환자와 의료진 간 소통, 상황별 의사결정까지 대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한 업무에 포함된 일부 과업이 자동화되는 것과 직업 전체가 사라지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봤다. 특정 기능의 자동화가 곧바로 고용 구조 전체의 변화로 이어진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자율주행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됐다. 기술 성능을 높이는 일은 실제 운행을 위한 첫 단계일 뿐이며, 극단적 상황에 대한 대응과 규제 요건, 사고 책임, 소비자 수용성까지 해결해야 상용화가 가능하다.
AI 역시 모델 성능만으로 기업의 대규모 도입이 결정되지 않는다. 기존 업무 흐름에 기술을 통합할 수 있는지, 사용자와 기업이 해당 기능에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있는지가 실제 채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기업용 AI는 모델 자체뿐 아니라 데이터와 업무 시스템을 연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세일즈포스가 기업 데이터와 업무 흐름을 AI 에이전트에 연결하려는 구상도 기술 성능을 실제 업무에 통합하려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도이체방크는 AI에 대한 극단적 전망이 주목받는 배경으로 이해관계자의 유인도 짚었다. AI 기업 창업자는 기술 비전을 설득해야 하고, 투자자는 성장 서사를 필요로 하며, 컨설팅 업체는 전환의 시급성을 강조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정책 결정자는 규제 개입의 필요성을 설명해야 하고, 미디어와 소셜 플랫폼은 부정적이거나 감정적인 전망을 확대하기 쉽다. 이 때문에 낙관론과 종말론이 온건하고 불확실성을 담은 판단보다 더 큰 관심을 받을 수 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보고서는 AI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기술 발전과 함께 기업의 업무 통합, 상용화 방식, 규제, 사회적 수용성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에서도 AI 인프라와 기업 업무 적용이 확대되는 가운데, AI 기술의 성능뿐 아니라 실제 업무 흐름에 정착하는 과정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도이체방크의 보고서는 AI의 발전 속도와 시장 채택 시점을 같은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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