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대형 서점을 방문하여 도서검색대에서 '비트코인', '블록체인', '암호화폐' 셋 중 하나로 검색한다면, 가장 먼저 어떤 단어를 선택할 것인가? 국내의 뜨거운 관심에 비해 프로그래밍이나 트레이딩 관련 도서를 제외하면 '암호화폐'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책들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최근 발간된 『암호화폐, 그 이후』는 그동안 암호화폐에 대해 다소 가볍게 다뤄졌던 지식들을 진지하고 정확하게, 그러면서도 동시에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담아낸 책이다. 무엇보다도 암호화폐와 관련한 각각의 주제에 대해 충분한 완결성을 띠며 일련의 흐름을 엮어간다는 점에서 이 책을 통해 충족되는 지적 만족도는 매우 크다.
책의 전반부는 비트코인의 탄생에서부터 사이퍼펑크가 만들어낸 디지털 프라이버시 기술로서의 암호화폐의 의미까지 다룬다. 마치 한 편의 SF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재미와 더불어 어느덧 비트코인에 대한 기술적 이해를 가지게 된다.
또한 하나의 사례로 등장하는 실크로드라는 이름의 다크웹은, 비트코인의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것이 왜 중요한지, 당시의 흥미진진했던 에피소드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당신이 지금껏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이름 하나만 알고 있었다면, 이 책을 통해 사이퍼펑크 세계에서 활약했던 더 많은 이름의 인물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마운트곡스 해킹 사건을 지나 중반부의 암호화폐의 성숙기에 이르면서는 비트코인이 가지는 실질적 가치에 대해 본격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동시에 필연적으로 다뤄지는 화폐와 은행에 대한 역사는, 현재까지도 종결되지 않은 '그래서 암호화폐는 돈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될 것이다.
지금의 암호화폐가 여러 측면에서 기대와 의심을 동시에 받고 있는 것처럼, 사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신용화폐의 첫 등장도 그러했다. 중앙은행이라는 절대적 주체 또한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고, 그렇게 세상에 원래부터 당연했던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처럼 금융과 기술은 다수의 필요에 의해 변화해왔고 지금은 암호화폐가 그 다음 주자로 새롭게 주목 받고 있을 따름이다.
지금도 블록체인 산업 내 다수의 프로젝트들이 현재의 특정 상황을 문제로 정의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만 지목된 문제의 주체가 은행, 대기업 혹은 정부 기관이라면, 그것은 엄청난 체력을 필요로 하는 결코 짧지 않은 과정이 될 것이다. 현재 가장 체력이 좋다고 평가되는 비트코인조차도 고전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민할 것이 단순히 '암호화폐가 기존의 돈이나 은행을 대체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행여 이 경쟁의 승자가 암호화폐가 된다 하더라도, 최후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반드시 비트코인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지금도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새로운 암호화폐들이 비트코인의 위상에 도전하고 있고, 때로는 경쟁자로서, 때로는 협력자로서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원서 'The End of Money'가 발간된 시점이 2017년 4월인 덕분에 이 책에서 다뤄지는 이야기 속의 시계는 그 이전의 시점에 맞춰져 있다. 비트코인에서 알트코인으로 주제가 전환되며 다가올 미래를 전망해 나가는 후반부는 막연하게 밝고 희망적인 미래만을 제시하는 여느 책들과는 달리, 암호화폐가 폭풍우 속에서 수많은 상처와 아픔을 뚫고 이제 막 양지로 나온 미성숙한 존재임을 강조하며 독자들이 현실적이면서도 균형 있는 관점에서 바라봐주길 기대한다.
이더리움의 등장과 더불어 스마트 계약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술은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꿔놓을 것 같은 기세지만, 자율기업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실험된 DAO(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의 실패 사례에서 본 것처럼 기술은 언제든 치명적 결합을 적나라하게 노출하며 모두의 관심 밖으로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아직은 절대적인 기대도, 절대적인 성공도 없다. 행여 당신이 기대의 반대편에 서서 극단적인 경계의 마음을 가진다 해도 좋다. 적어도 기대도 경계도 아닌 무관심에 머물러 있는 것만 아니라면, 당신은 '암호화폐, 그 이후'의 변화할 세상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면, 암호화폐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초심자에서부터 오래 전부터 지식과 경험을 쌓아온 암호화폐 관심자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의 대상에게 높은 활용 가치를 가진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만약 가능하다면 암호화폐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과거의 나 자신에게도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신기헌
피어(http://peer.com)의 구성원으로 블록체인 산업 내 발전적인 일들을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