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그레이스케일 인베스트먼트(Grayscale Investment)라는 자산운용사가 런칭한 가상자산(암호화폐) 전용 트러스트 펀드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올 들어 10억 달러에 이르는 대규모 투자금이 유입되면서 우리 돈으로 4조 원 이상의 자금을 굴리는 `그레이스케일 비트코인 트러스트`와 `그레이스케일 이더리움 트러스트` 말입니다.
반가웠던 대형 가상자산(암호화폐) 펀드의 등장
거래량 자체가 위축된 시장에 큰 펀드가 등장하자 이 펀드가 한꺼번에 사들이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비트코인 캐시, 제트캐시, 리플 등의 시세가 강한 오름세를 보였습니다. 특히 올 2월부터 5월까지 새롭게 채굴된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전체 물량의 30~50%를 그레이스케일이 독식하면서 일정 부분 가격 왜곡이 나타났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레이스케일 펀드가 시장에 버블을 초래하고 있다며 불만을 표시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소식도 전했었죠.
그로부터 한 달 반쯤 지난 최근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레이스케일이 운용하던 그레이스케일 이더리움 트러스트 펀드의 순자산가치가 한 주 만에 50% 이상 폭락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이 기간 중 시장에서 이더리움 가격이 소폭 상승했는데도 펀드 가치만 이렇게 큰 폭으로 떨어졌으니 투자자들이 느끼는 공포는 더 컸을 듯합니다.
한 주 만에 50% 이상 폭락한 펀드
이번 펀드 가치 급락의 주범은 미국 증권거래법에서 규정하는 공인투자자(accredited investor)들이었는데요. 이 공인투자자는 순자산이 100만 달러 이상이거나 연 소득이 20만 달러 이상인 개인 또는 자산규모 500만 달러 이상인 기관투자자와 금융회사들만 사전에 승인을 받아 사모펀드나 헤지펀드, 가상자산(암호화폐) 전용펀드 등에 마음대로 투자할 수 있습니다. 위험자산에 투자할 수 있는 기관투자자나 큰손 개인 정도라고 보면 될 겁니다.
그레이스케일 이더리움 트러스트에도 많은 공인투자자들이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처음 펀드가 만들어질 때 투자금을 넣은 초기 투자자들이었는데요, 초기 펀드에 투자한 뒤 1년간 투자금을 회수할 수 없도록 보호예수(lock-up)에 묶여 있었습니다. 투자자들은 계속 들어오는데 초기 투자자들이 금세 투자금을 빼 버리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일종의 펀드 안전장치인 셈입니다. 그리고 펀드 규모가 커지고 이더리움 가격을 끌어올리며 높은 수익률을 내자 장외(OTC) 유통시장에서 이 펀드에 투자한 개인들이 늘어났습니다.
락업 풀린 공인투자자들의 이탈
문제는 이렇게 펀드에 계속 자금이 들어오니 그레이스케일 측은 계속 시장에서 이더리움을 사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이더리움 가격에 거품을 만들었습니다. 또 펀드에 투자하고자 하는 투자자들이 계속 들어오다 보니 펀드가 보유하고 있는 이더리움 가치보다 펀드 자체의 가치(=펀드 순자산가치)가 너무 비싸지는 일도 생겼습니다. 펀드 순자산가치가 가장 높았을 때엔 시장 내 이더리움 가격보다 최대 700% 이상 프리미엄이 붙었다고도 합니다.
펀드가 처음 만들어진 뒤 1년이 지난 6월부터 수익금을 챙기고 펀드에서 발을 빼는 초기 공인투자자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투자하고 1년을 참아온 이들에겐 아주 높게 형성돼 있는 펀드 순자산가치가 하락하기 전에 투자금을 현금화할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공인투자자들을 비난할 순 없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공인투자자들의 펀드 이탈에 따른 손실은 고스란히 뒤늦게 뛰어든 개인투자자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순식간에 펀드 순자산가치가 반토막 난 상황에서 개인투자자들은 펀드 가치가 다시 올라가는 시점까지 기약없이 기다려야 할 판입니다.
충격 없었지만 해결돼야 할 정보 비대칭
다만 이더리움 시장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펀드의 초기 투자자들이 손을 터는 과정에서도 이더리움 현물 시세에 큰 변화가 없었다는 점이 이를 잘 입증합니다. 그레이스케일 측에서도 "초기 공인투자자들이 지분을 팔고 나갔지만, 이들 중 다수는 다시 펀드에 자금을 재투자하고 있고, 심지어 이들이 빠진 자리에 다른 거액 투자자들이 들어오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더리움에 끼었던 거품이 일정 부분 걷히면서 이더리움을 매도하거나 심지어 공매도하려던 투자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스케일 이더리움 트러스트의 초기 공인투자자들에게 부여된 보호예수 기간이나 투자 규모 등이 개인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이나 트러스트 펀드의 중도 처분이 기관투자자들에게만 유리하도록 설계돼 있다는 점 등은 투자자 간 정보 비대칭이나 불평등과 같은 가상자산 시장의 고질적인 문제로 회자될 것으로 보입니다. 초기 시장 `고래`나 최근 늘어나는 기관투자자들에 비해 불리할 수밖에 없는 시장 구조가 조속히 개선되길 기대해 봅니다.
댓글 1개
NCWT
2020.07.14 13:10:47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