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의 정석> 맹윤호 저자] 지난달 6일, 유명한 암호학 전문가 브루스 슈나이어(Bruce Schneier)가 와이어드(Wired)에 <이제 블록체인 기술을 더 믿을 이유가 없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해당 기고를 담백하게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블록체인 폭망한다.”
블록체인 기술이 주장하는 합의 알고리즘의 기술적 배경, 설계의 근간이 기존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할뿐더러, 그런 상황에서 사기가 판치고, 과대 포장이 심해 어떤 기술도 ‘믿고’ 검토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내용이다. 설사 제대로 구현된다고 하더라도 구현에 소모되는 비용이 매우 비싸기 때문에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후문이다. 이때 비용은 단순히 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현에 들어가는 시간, 기술력 등의 총합을 함축한다.
확실히 이대로 가다가는 슈나이어의 말처럼 ‘믿을 수 없는 기술’이 될 것 같다. 잊을 만 하면 들려오는 스캠 소식과 거래소 해킹에 이어 코인거래소 프라이빗 키를 가지고 있던 유일한 개인의 죽음 등 석연치 않은 소식들이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한국에서 많은 사람이 암호화화폐 공개(ICO)에 참여했다가 사기를 당하거나, 상장 뒤 가격 하락 탓에 마음 아파했다. 필자도 통장 한 켠에 리플의 가슴 아픈 흔적이 남아 있다. 투자자의 통장 잔액이 말해주듯, 슈나이어가 지적한 것처럼 블록체인은 더는 믿을 만한 기술이라 볼 수 없는 걸까?
페이스북은 블록체인 관련 신규 채용을 늘리고 있다. (image : Facebook)
다행히 올해는 양상이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든다. 이런 기대감은 단순히 필자 개인의 예측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블록체인 업계의 움직임을 통해 그려지는 전체 동향이 달라지는 까닭이다.
SF 작가 윌리엄 깁슨은 “미래는 이미 와 있으며,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주변을 집중해서 둘러보면 우리는 미래를 관찰할 수 있다. 올해 들어 JP모건은 이전의 부정적인 암호화폐의 전망을 철회하며 암호화폐를 발행하겠다고 했다. 카카오가 자체 코인을 발행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라인은 이미 링크(LINK)를 통해 자금을 조달한 바 있다. 그동안 사용성이라는 아주 큰 숙제를 안고 있던 암호화폐 지갑 애플리케이션도 삼성의 갤럭시S10 발표와 함께 ‘블록체인 키스토어’의 형태로, 지문 인식 한 번이면 지갑 생성부터 송금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이어 페이스북은 자체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위 사례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이미 신뢰를 얻은 기업이나 기관들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즉,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퍼블릭 블록체인을 통해 ICO 등을 실시하던 상황에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블록체인 프로젝트의 축이 이동 중인 셈이다.
1년 전만 해도 이름을 들어본 바 없는 업체들이 ‘블록체인 기술’ 자체에 대해 “신뢰하고 (본인들에게) 투자하라”고 말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기술에 대한 과장이 심했다. 상호 이해 없이 로드맵을 발표했다가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곤 했다.
21일 JTBC는 콘텐츠 프로토콜과 손잡고 시청자 데이터 분석에 나섰다. (image : JTBC)
상황은 점차 바뀌었다.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더는 ‘블록체인 기술’ 자체를 신뢰하라고 할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 이미 상장된, 누구든 신뢰할 만한 기업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믿으라고 하는 양상이다. 이 기업들은 한 사람에게 소유돼 있지 않고 업력과 기술력도 검증된 곳이다. ‘신뢰의 위임’이 일어나는 것이다. 인제서야 기술을 기술 그 자체로 볼 기회가 블록체인 업계에 생겼달까. 신뢰의 대상으로서의 ‘머신(Trusted Machine)’에서 비로소 ‘오토마타(Automata)’* 그 자체로 다가갈 수 있게 됐다.
*오토마타 : 계산 능력이 있는 자동 기계을 일컫는 말이다.
이 중심에는 프라이빗 블록체인이 자리하고 있다. (정확히는 허가형 블록체인(Permissioned Blockchain)이 표기상 맞으나, 슈나이어의 기고 글에서 프라이빗(Private)으로 표현했으므로 이에 맞게 표기하겠다.)
프라이빗 블록체인이 자리 잡는 이유는 명료하다. 아직 퍼블릭 블록체인보다 프라이빗 쪽이 실제 제품 레벨에서 사용하기 위해 기업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조건들을 일부 만족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이미 주식시장에 상장돼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ICO보다 블록체인을 활용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등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 변동성이 거의 없는 스테이블 코인 발행을 통해 실제로 ‘화폐’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암호화폐를 개발하면서 자신들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모색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곧 암호화폐가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쏟아지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해외의 경우 마진거래까지 가능한 현재 상황에서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통한 대폭의 유동성이 기업에 공급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일찍이 ‘신뢰’에 대해 데카르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며 시작되는 증명방법인 ‘방법적 회의’의 명언을 남겼다. 이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 자신 외에는 존재에 대한 신뢰 근거가 없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사람은 그저 던져진 존재로서 살아가는 데 반해 내가 사는 세상이 영화 <매트릭스>의 가상세계이거나 퍼트남(Putnam)의 ‘통속의 뇌(Brains in a Vat)’가 아니라고 그저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그렇게 믿지 않으면 살아가는 데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철저히 ‘유용성’에 근거한 판단이다.
중국 정치가 덩샤오핑은 “고양이가 검든 희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고 말했다. 이걸 필자의 언어로 말하자면 “프라이빗이건 퍼블릭이건 얼마나 유용한지가 좋은 블록체인”인 셈이다.
이를 프라이빗 블록체인의 신뢰성 논의로 옮겨와 보자. 내가 지금 블록체인을 신뢰하지 못하는 건 지금 블록체인이 ‘믿을 만큼 유용하지 않다’는 말과 같다. 맞는 말이다. ‘현재’의 블록체인은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유용해지기 위해서 불편한 사용자경험(UX), 사기, 랜섬웨어 같은 범죄 악용 등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특히 프라이빗 블록체인은 기존의 서비스와 어떤 점이 다른지 끊임없이 도전받을 것이다.
필자는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처음 나왔을 때부터 완벽했던 기술은 없었다. 현재 블록체인 분야는 이미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고 있다. 자금이 흘러들 그중에서 소수의 ‘진짜’ ‘유용성’을 더하는 플레이어들이 나타나고 있다. 사기꾼 취급을 받으면서도 새로운 프로토콜을 만들고, 새벽같이 외신 속보를 전하고, 더욱 쉽게 개발에 사용할 수 있는 툴을 만들고, 한 줄의 코드를 오픈소스에 기여하기 위해 밤낮을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신뢰의 근간에는 결국 ‘유용성’이 있다. 나는 자본의 본능과 인간의 탐욕을 믿는다. 근시안적으로 일회성 이윤 추구의 기회로 보는 사람들은 이제 퇴장하고 있다. 남은 사람들, 새로 참전한 기업들 ‘지속가능한’ 이윤추구를 위해 현재 블록체인의 ‘불충분한 유용성’을 정말 ‘유용하게’ 만들어내려 한다. 블록체인이 충분한 ‘유용성’을 확보하는 순간, 믿지 못하겠다고 외치던 사람들은 잠잠해질 수밖에 없다. 그들이 주장해 마지않던, 신뢰하지 못하는 오만가지 기술적인 이유가 모두 사라지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록체인은 ‘유용성’을 기반으로 ‘신뢰’를 얻어 도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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