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보다 뜨거운 '전자 경제'…21조 달러 몰리는 차세대 전력 혁명

| 김민준 기자

실리콘밸리가 인공지능(AI)의 환상적 가능성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전 세계 산업 지형을 재편하는 진짜 변화는 눈앞의 전기 흐름에서 일어나고 있다. 소프트웨어처럼 프로그래밍 가능한 전기의 시대, 즉 '전자 경제'가 본격화되면서 기존 에너지 산업의 개념이 급격히 재정립되고 있다.

블룸버그NEF에 따르면 향후 에너지 전환에 투입될 자금은 약 21조 달러(약 3경 2400조 원) 규모로, 이는 지금까지 AI에 투자된 금액의 20배,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 등 FAANG 전체 시가총액을 능가하는 수준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렇게 쏟아지는 자금 중 다수가 태양광 패널이나 풍력 터빈이 아니라 '스마트 전력 플랫폼'을 구축하는 소프트웨어에 집중된다는 사실이다.

몬토크 클라이밋의 최고 투자책임자 에반 캐런은 전통적인 에너지 투자자들이 여전히 태양광과 천연가스의 비율 논쟁에 머물러 있는 반면, 혁신 기업들은 전력 흐름 자체를 디지털화하고 거래 가능한 자산으로 바꾸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AI가 정보를 처리하듯, 전력 시스템도 이제 지능화와 플랫폼화 과정을 밟고 있다"며 "이는 단순한 에너지 믹스의 변화가 아닌 유틸리티의 기술 산업화"라고 말했다.

특히 AI의 전기 소비량은 상상을 초월한다. 챗GPT의 단일 쿼리는 일반적인 구글 검색보다 10배 많은 전력을 소비하며, 엔비디아의 GPU 팜은 한 도시에 버금가는 전기를 사용한다. 전력 시스템의 디지털화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중국은 이미 세계 배터리 생산의 80%를 점유하며 '전자 경제'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이같은 전환을 이끄는 핵심 트렌드는 세 가지다. 첫째, 하드웨어 가격의 구조적 하락. 지난 10년간 태양광, 배터리, 전기차(EV)는 제조비용이 90% 가까이 하락하며 대중화가 가능해졌다. 둘째, 모든 기기는 이제 에너지 종점이다. 미국 가구당 평균 25개 이상의 전기 연결 기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은 전기 소비뿐 아니라 거래 기능을 갖춘 에너지 주체로 기능한다. 셋째, 시장 개방이다. 에너지 산업의 탈규제 기조는 신생 스타트업에게 거대한 진입 기회를 열고 있다.

이 속에서 차세대 유니콘 기업이 태어날 만한 영역들도 구체화되고 있다. 디지털 전력망 구현을 위한 '그리드 디지털 트윈'은 500억 달러(약 72조 원)에 달하는 미개척 시장으로, 굳이 고객의 전화를 받아야만 정전 사실을 인지하는 기존 시스템의 맹점을 기술로 보완하는 것이다. 또, 전력 수요 반응(DR)을 토큰화해 거래 가능한 자산으로 만드는 전자 트레이딩 플랫폼은 글로벌 1조 달러 규모의 전력 시장에서 새로운 금융 생태계를 열 전망이다.

가상 발전소(VPP)는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대표 사례다. 기후 위기 상황에서 캘리포니아의 한 VPP는 열파 기간에 하루 만에 고객당 3,000달러(약 430만 원)의 전력 수익을 창출했다. 아울러, AI 스스로 전력 소비를 최적화하며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완충하는 'AI-그리드 최적화' 기술 역시 주요 투자처로 부각되고 있다.

앞으로 10년간 최고의 창업자와 투자자는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명제를 뛰어넘어, 이 소프트웨어를 구동하는 '전자'에 주목할 것이다. 전자 경제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이 거대한 패러다임의 주도권을 쥐는 쪽이 기술 산업 전체의 중심으로 부상할 날이 머지않았다.